취미 피아노 연습생의 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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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발라드 1번(Ballade No.1 in G minor Op.23)
지휘자&피아니스트 정명훈 버전 : https://youtu.be/ZKocxJFkUQo
쇼팽 발라드 1번을 연습하는 건 내게 정말 큰 도전이라 가장 많은 시간을 악보 보는데 할애하고 오랜 시간을 들여 연습하고 있다. 피아노를 치다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에 화가 나 엉엉 우는 추태도 부리기도 했다. 도무지 넘어가지 않는 두 마디를 위해 몇 시간을 끙끙거렸다. 이동 시간에는 악보를 펼쳐서 악보를 자꾸 읽었다. 술을 먹고서도 연습을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밀려들어 연습실에 갔다가 피아노 앞에서 꼬박 1시간을 자다 온 적도 있다. 물론 고꾸라진채로.
이렇게 한 곡을 오래도록 연습하고 있는데도 곁을 내주지 않는 쇼팽 발라드 1번은 눈을 흘기고 싶을 정도로 밉다. 그래도 돌이켜 보면 좌절하는 시간만큼이나 배운 것이 더 많았다. 가장 큰 수확은 나도 모르고 있던 잘못된 주법들을 발견한 것이다.
손이 작은 나는 그 생각에 아주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었나 보다. 내 손으로는 옥타브를 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있었던지 어느 순간부터 손을 쫙 편 채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분명 피아노를 처음 배울 때는 '달걀을 손에 움켜쥔다고 생각하고' 피아노를 치는 거라고 배웠는데도 말이다. 연습량이 급격히 늘어나는 시점에 잘못된 버릇이 생겨버리니 금방 내 습관이 되었다. 게다가 쇼팽 발라드는 손을 쫙쫙 벌려야 하는 부분이 많은 곡. 이를 인지할 새도 없었다. 다행히 피아노 선생님이 내가 치는 모습을 보고 이상함을 느꼈던지, 손을 많이 벌리지 않아도 되는 구간을 다시 연주해보라고 하셔서 발각되었다.
인이 박인 이 말썽을 고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해온 만큼의 연습을 다시 해야 했다. 갑자기 억울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험난했는데 이걸 다시 해야 한다니! 건반에 닿는 모든 터치가 낯설었다. 나는 손가락의 말랑말랑 살이 있는 부분으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하지만 올바른 터치는 손가락의 첫 번째 마디를 굽혀 손끝으로 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마디에 결국 모든 음에 손가락 모양을 다시 만들어 연습해야 했다. 생각보다는 빨리 적응했지만 그래도 일주일이 넘게 끙끙댔었다. 이제는 전보다 훨씬 명확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게 아주 큰 성과!
또 다른 잘못된 습관은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 힘으로 누르는 것이었다. 피아노는 엄연한 타악기라 '친다'에 가깝게 중력을 이용해야 하는데 나는 회사에서 키보드를 누르는 것 마냥 꾹꾹 '눌렀다'. 어쩐지 내가 내는 소리가 답답하더라니. 예고로 진학할까 생각했었다던, 피아노를 오래 치셨던 전 회사의 팀장님의 키보드 소리가 유난히 명쾌했던 건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건반에서 손을 뗄 때 소리가 지저분하게 끊어지는 편이라 가끔 그 이유를 골똘히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조금밖에 치지 않았는데 손이 금방 피로해지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에는 그저 어제 잠을 덜 자서 그런 거라며, 비타민을 먹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모든 피아노 소리가 내게 경광등을 울리고 있었는데 나는 알아먹지도 못했던 것이다.
툭- 툭- 치는 연습이 필요했다. 중력의 도움을 받아 누르지 않고 치는 법. 그렇게 또 한 번 건반을 치는 방법을 수정했다. 확실히 주법을 바꾸니 소리가 달라졌다. 계속 느껴왔던 답답한 느낌은 사라지고 소리가 공명하듯 넓게 잘 울렸다. 건반에서 손을 떼더라도 여음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후 스르르 소리가 없어졌다. 오랜 시간 연습을 하더라도 손이 확실히 덜 아팠다.
음표가 많은 악보일수록, 옥타브가 있을수록 나는 건반에게 질척거렸다. 아주 손에 힘이 들어간 상태로 건반을 꽉 쥐고는 놓지 않았다. 연약한 유리알을 손에 쥔 것도 아닌데 나는 음을 떨어트릴까 봐 자꾸 건반을 움켜쥐었다. 절대 놓치면 안 되는 것처럼.
이렇게 치면 문제가 세 가지 있다.
첫 번째로는 팔에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면서, 치면 칠수록 힘이 달려가고 부상의 위험도 생긴다.
오랜 시간 연습을 하다 보면 손가락, 팔목, 팔이 아파왔는데 아둔했던 난 연습의 훈장 같은 거라고 생각했었다. 고3 때 펜을 잡는 세 번째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겼을 때처럼 자랑스러워했다. 이것도 피아노 선생님이 찾아낸 잘못된 주법인데 선생님이 그랬다. 이렇게 치다가는 어디 손이나 손목이나 어디 하나의 인대가 늘어나서 몇 주동안 피아노를 치지도 못할 거라고. 피아노를 몇 주 동안 칠 수 없다니. 이런 끔찍한 일이 생기기 전에 어떻게든 힘을 풀면서 쳐야 했다.
두 번째로는 박자가 뭉개진다.
음악의 템포에 맞춰 빠르게 손의 위치를 바꿔줘야 하는 상황에서 나처럼 전 음표에 매여 있으면 당연히 다음 음표를 치지 못한다. 기민하지 못한 손으로 피아노를 치다 보면 박자는 점점 늘어지게 되고 전체적인 균형이 깨진다. 물론 나도 전에 박자가 뭉개지면 뭐어땨용? 파였는데 박자의 기준점을 잃어버리는 순간 곡은 정처 없는 방랑자가 된다. 누가 들어도 산만하고 뭘 말하는지 모르겠는 그런 요상한 음악이 되어버린다.
마지막으로는 소리가 둔탁하다.
소리가 빵빵빵빵 ~ 나지 않고 빡박뱍뺙 난다.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손가락 끝으로 음을 잡아버리기 때문에, 힘을 다른 곳에 불필요하게 주느라 손가락에 균일하게 힘이 들어가지 않은 탓이다. 치는 동시에 힘을 풀어야 음악이 생겨난다. 그제야 원하는 세기와 음량으로 연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어쩜 그렇게 잘못된 버릇이 많았었는지. 지금이야 웃으며 글을 쓰고 있지만, 큰 문제점들이 하나씩 발견되는 순간마다 정말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금은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오랜 시간을 연습해도 전처럼 팔이 아프지 않다. 적은 힘으로 충분히 fff(포르티시모, 아주 세게)를 연주할 수 있다. 전에는 업라이트 피아노로 연습하다가 그랜드 피아노 앞에 가면 소리가 급격히 작아지고, 심지어 건반도 제대로 눌리지 않았는데 이젠 그랜드 피아노라도 적당한 음량을 유지하면서 피아노를 칠 수 있다. 이거 말고도 장점을 적어도 20가지는 댈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곡을 고를 때 심하게 어려워 보이는 곡은 피하는 편이었다. 아직 내가 그럴 깜냥이 안된다고 여겼던 것도 있지만, 빤히 보이는 고통의 굴레에 나를 던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 번 경험해보니 꼭 필요한 일인 것 같다. 좌절하는 순간마다, 부딪히는 순간마다 이를 악물며 연습을 하다 보면 분명 변하고 있었다. 고향집에 내려가면 TV 볼 때 제발 피아노를 치지 않을 순 없냐고 하던 아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와 피아노 소리가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칭찬을 했다. 왼손을 아주 크게 쳐야 하는 곳에서 늘 힘이 달려 적당히 치던 곳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애플 워치에서 처음으로 '소음주의' 경고음이 떴다. ‘애'보다는 '증'에 가까웠던 쇼팽 발라드 1번이지만 덕분에 한 뼘 더 자라고 있는 모양이다.
1번 레슨이 끝날쯤 선생님에게 당분간 쇼팽은 쳐다도 보지 않을 거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젠 그 노오란 악보집을 꼼지락꼼지락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아마도 내년 봄쯤에는 또 다른 발라드를 치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