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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태기의 원인들

조금은 민망스럽지만

by 스밍




차이코프스키 <명상> op.72 no. 5
손열음 ver : https://youtu.be/gbUzFRMEKP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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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자처럼 하루에 피아노를 몇 시간씩 치는 것도 아닌 내게 민망스럽게도 피태기라는 게 찾아왔다. 음, 조금 거창하니 '시간만 나면 밥 먹듯 드나들던 피아노 학원을 자주 흐린 눈 하고 지나치는 상태'라고 말하자. 굳이 원인을 찾아보자면 몇 가지가 있었다.


작은 손이 불러온 고난

먼저 한 옥타브가 넘는 화음이 많은 곡에 비해 손이 크지 않아 쫄리는 마음이 컸다. 마음 놓고 칠 수 없는 구간이 오면 손과 몸이 바짝 긴장했다. 지나가는 음표들을 뒤따라가려면 뭐라도 움직여야 했고 그 방식을 자꾸 소리를 크게 내는 걸로 퉁치려고 했다. 문제는 피아노를 팔힘이 아닌, 어깨와 손목으로 내리치는 데 있었다. 소리는 지나치게 크고 날카로웠다. 여태까지 짚어왔던 곡의 흐름은 금방 깨지고 마디들은 듬성듬성해졌다.


손끝까지 꽉꽉 눌러 담은 힘은 금방 나를 지치게도 만들었다. 손목과 손이 아파 곡의 중간중간에 자꾸 멈췄다. 전에 수영 강습을 받았던 게 생각이 났다. 물을 먹을까 무서웠던 나는 자꾸 몸을 굳혔다. 그냥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인데 굳은 몸으로 호흡하려니 속도를 잃어버렸다. 템포를 놓치니 숨을 쉴 수가 없어 자꾸 수영장 바닥을 발로 박차고 일어났다. 한 레인을 갈 때 적어도 다섯 번은 그렇게 일어났었다.


지금도 같았다. 선생님은 다양한 말로 내게 숨 쉬는 법을 알려줬지만 가장 중요한 것, 힘을 푸는 건 내가 깨닫기 전에는 절대 이루지 못할 것이었다.


이제야 보이는 것들

내가 가지고 있는 나쁜 버릇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피아노 칠 때 어깨를 올리지 않는 법은 어릴 적부터 몸에 익혔지만, 곡이 힘겨워지면서 모든 균형이 깨졌다. 특히 어려운 부분이 나오면 내 어깨는 자꾸 하늘로 하늘로 그리고 또 하늘로 치솟았다. 어깨를 올린다고 해서 그다음 마디가 잘 연주될 거라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다.


계란을 쥐고 있듯 동그랗게 손을 말아서 연주하지 않고, 거의 피아노 건반에 붙어있듯 평평하게 연주하고 있는 것도, 한 음을 칠 때 손가락을 던지듯이 치고 있는 것도 발견했다. 손가락을 에라 모르겠다 하고 건반에 던져버리는 건 진짜 문제였다. 음의 소리가 전부 나지 못하고 날카롭게 뚝뚝 끊겼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못 치는데!) 아무리 피아노가 타악기라 하더라도 너무 심했다. 잘못 들인 버릇에도 원인은 있었지만, 다른 이유로는 내가 빨리 이 곡을 해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에 있었다.


피아노를 치는 올바른 손 모양(출처 : 야마하코리아)




습관적 흐린 눈

연습하는 패턴에도 개선이 필요했다. 보통 난 연습할 때 곡의 앞부분부터 쭈욱 치는 편이다. 사실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면 응당 그 마디를 완벽하게 만들고 뒤로 넘어가는 게 맞지만 자꾸 눈을 흐리며 스윽 지나가버리곤 한다. 그러다 보니 보통 곡의 앞부분만 기깔나지는 편이다. 마치 수학의 정석의 집합 부분만 밑줄로 너덜너덜하듯이 말이다. 난이도가 적당한 곡은 그래도 1~2주 정도 연습하면 대충이라도 균형을 맞출 수 있는데, 흐린 눈을 하는 부분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어려운 곡은 밸런스를 맞추기 더욱 힘들었다.


어느새 찾아온 레슨. 연습을 하지 못해 불안한 마음은 콩알 같았지만 피아니스트에 빙의해 멋지게 곡을 시작하니 선생님도 놀란 눈치였다. 그렇지만 이내 둥당당 삐걱삐걱하는 나를 보더니 바로 말씀하셨다.


‘연습은 곡의 가장 뒷 마디부터 한 마디씩 완성하는 느낌으로 해야 해요.’


들어보면 가장 단순하고 쉬운 방법인 것을. 왜 나는 여태껏 멀리멀리 이 말을 피해 다녔을까. 한 마디가 잘 되지 않으면 그 마디를 될 때까지 쳐야 하는 건 진리였다. 빠르지 않더라도 천천히. 그러다 보면 낯을 가리던 건반도 어김없이 낯을 익힐 텐데 말이다.




이 피태기에 유튜브 클립도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저 썸네일에 홀려 들어가긴 했지만. 신창용 피아니스트는 정말 치기 싫은 곡을 연습 시작 전 손을 푸는 용도로 아주 느리게 친다고 했다. 곡에 대한 부담을 덜면서도 손에 익힐 수 있는 방법이라고.


나는 연습을 시작하기 싫거나, 하다 막히면 괜히 고양이 춤이나 히사이시 조의 <summer>, 소나티네 몇 곡 등 어렸을 때치곤 했던 곡들을 중구난방으로 치곤 하는데 그러지 않는데 도움이 많이 됐다. 아무리 멀리하고 싶더라도 지금 연습해야 하는 것부터 우선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다시 어려움을 버틸 수 있는 근육들이 자라나고, 피아노 의자에 자주 앉을 수 있는 관성이 다시 생겨났다.


가끔은 언제까지 이렇게 천천히 하나씩 음을 짚어가야 하나 답답해 소심하게 건반 몇 개를 꽝하고 누르기도 했지만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다시 곡의 속도를 낮추고 한 음 한 음 유의 깊게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면서. 그리고 결국 천천히 곡을 끊기지 않고 칠 수 있을 정도까지 다다랐다.



https://www.youtube.com/watch?v=jakH5b4XD7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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