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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세 달간의 연습 - 피태기가 오다

차이코프스키 <명상> op.72 no. 5

by 스밍





차이코프스키 <명상> op.72 no. 5
손열음 ver : https://youtu.be/gbUzFRMEKPU


여태까지의 곡 중 이렇게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던 곡은 처음이다. 무려 10월 말에 시작해 삼월 초에야 끝이 났으니 네 달이나 걸린 셈이다. 코로나가 심해져 피아노 학원에 아예 가지 못한 한 달을 빼더라도 세 달이 넘는 기간이다. 손열음 피아니스트의 유튜브에서 11살에 치기 시작했다는 말만 듣고 덜컥 치기 시작한 곡인데 이렇게 까지 힘들 줄이야.


처음 악보를 보고 생각보다 쉬운데? 하고 망언을 지껄였던 내 입이 아직도 밉다.


Noooooo..... Stay.......


게다가 코로나로 한 달을 통째로 날렸다.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이후로 가장 많이 쉰 기간이었다.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상황이 오자 집에 피아노가 없는 나는 시간만 죽일 수밖에 없었다. 피아노를 칠 땐 일주일마다 늘 손톱을 깎는데 그럴 일도 없었다. 평소와 달리 자라 있는 손톱 만큼이나 마음이 조급하고 불편해졌다.



코로나 거리 두기가 조금 풀렸을 무렵 예약이 가능한 피아노 연습실을 찾아 악보를 들고나갔다. 연주는 생각보다 더 끔찍했다. 손가락에는 금세 근손실이 와 피아노를 제대로 누르지도 못하고 있었고 박자는 묘하게 엇나갔다. 기껏 익혀놓은 곡의 감과 주법들도 깡그리 날아갔다. 손가락 번호까지 헷갈렸다. 재즈의 박자로, 조율이 되지 않은(몇 음은 눌리지 않은) 오래된 피아노를 치는 듯 들렸다.


가뜩이나 아슬아슬하게 모래성처럼 세워놓았던 느낌들이 다 무너지고 수포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잘 치고 싶었던 곡이기도 하고 연습도 더뎠기에 좌절감은 더 컸다. 아쉬운 마음은 자꾸 내 몸과 팔을 옥죄었다. 귀는 닫히고 손목은 굳었다. 그렇게 조금씩 톱니바퀴가 잘못 끼워지고 있었다.


나는 점점 기계처럼 음들을 짚었다. 틀릴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은 금세 티가 났다. 손목과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 둔탁한 소리가 나거나 여리게 쳐야 할 부분에서 지나치게 큰 소리가 났다. 매끄럽게 지나가야 할 부분에서도 한 마디를 넘기지 못했다. 다시, 또다시 쳐도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연습이 끝나면 손목과 손이 너무 아파 오래 손을 탈탈 털며 풀었다.


전의 곡들은 연습을 하면 아주 조금씩이라도 늘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가 있었지만 이번 곡은 하면 할수록 도돌이표만 도는 느낌이었다. 심지어는 손가락 번호도 익숙해지지 않아 매번 한 두 마디를 치다가 멈추고, 또 한 마디를 치다가 멈췄다. 집중력도 오래 가지 못했다. 만족스럽지 않은 연습을 하고 온 날마다 생각했다. 나야 취미기도 하고 그다지 어렵지 않은 곡이라도 이런데, 어떻게 피아노를 전공하는 사람들은 이런 장벽을 깨쳐나갈 수 있었는지.


자꾸 불편한 마음은 피아노 학원으로 향하는 발걸음 조차 얽맸다. 괜히 배가 고파서 밥을 먹다가, 주말이니 좀 더 잠을 자고 싶어서 갖은 이유를 대며 연습하러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연습을 하지 않는 내가 싫었다. 피아노를 치지도 못하는 주제에 연습조차 하지 않다니. 양자적인 마음이 자꾸 내게 다가왔다.


그렇다. 감히 내게 피태기, 피아노 권태기가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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