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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밍 Jul 03. 2017

#45 <엘르> 제목이 'Elle'인 이유

Elle는 프랑스어로 '그녀'를 뜻한다.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Elle(엘르)는 프랑스어 인칭대명사로, '그녀'를 뜻한다. 사실 인칭대명사를 영화의 제목으로 쓰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생각보다 인칭대명사가 제목 그 자체인 영화들이 별로 없고 2013년 개봉한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그녀(Her)>도 인칭대명사가 아니다. 하지만 폴 버호벤 감독의 영화 <엘르>는 이를 끌어놓았다. 이런 담대한 시도는 영화가 여러 갈래로 그녀, 주인공 '미셸(이자벨 위페르)'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만 가능한 것이었다.


주인공 미셸. <엘르>스틸컷


카메라는 철저히 관조하는 시선으로 그녀를 비춘다. 그녀가 첫 번째로 강간을 당하고 나서도 우리는 그녀의 심중을 파악하기 힘들다. 표정의 변화도 별로 없고, 감정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듯하다. 경찰에 연락을 취하지도 않는다. 단지 평온한 표정으로 도끼와 호신 스프레이를 사고, 자물쇠를 바꿀 뿐이다.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미셸의 표정은 분명하지 않다. 웃는 건지 찡그리는 건지 모를 표정만 띄울 뿐이다. 우리는 다소 직설적인 말이나 행동으로만 그녀의 본심을 추측할 수 있다. 많은 영화 리뷰에서 미셸을 '애매모호한 인물',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칭하는 이유다. 미셸은 이 지점에서 3인칭을 지칭하는 '그녀(Elle)'로 존재한다.


게다가 미셸은 어렸을 적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다. 범인은 다름 아닌 미셸의 아버지로 살인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와 미셸에게 집에 불을 지르게끔 했다. 그때의 모습을 찍은 미셸의 사진은 사건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미셸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아버지의 가석방 공판이 다시 화두로 떠오르면서 미셸은 낯선 사람에게 면박을 당하기도 한다. 여기서의 미셸은 미셸이 아닌, 그 사진 속 '그녀', 연쇄살인마의 딸로서만 지칭된다.


또한 회사 직원 중 하나는 성적인 영상에 미셸의 얼굴을 합성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이를 퍼뜨린다. 이웃집 남자는 미셸을 수 차례 강간한다. 이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미셸 주변에 있는 모든 남자들은 미셸에게 폭력을 가하는 가해자다. 미셸은 많은 여성들이 그러하듯 대상화되고, 타자화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미셸은 이 틀에 갇히지 않는다. 오히려 관념의 전복을 보여준다. 먼저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것들에 맞서 싸운다. 이는 '복수극'보다는 '자아실현'에 더 가깝다. 그녀의 행동을 단순히 복수의 관점에서만 바라봐서는 안된다. 누구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체가 판단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옛날에 수치심은 여성이 성적인 피해를 당했을 때 당연하게 갖춰야 할 덕목이었다. 하지만 미셸은 말한다.

수치심이 우리의 행동을 막을 만큼 강하지 않아.

미셸에게 여자라면 으레 행동해야 할 일종의 양식들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사회가 정해 놓은 일종의 규범 역시 마찬가지다. 친구의 남편과 성적 파트너로 지냈던 이유를 묻는 친구에게 그냥 자고 싶을 사람이 필요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부인이 있는 유부남에게 욕망을 느낀다. 여기서 미셸은 더 이상 3인칭을 뜻하는 'Elle'가 아닌,  문장의 중심이자 서사의 주체인 '그녀'로 자리한다.  


<엘르> 스틸컷


프랑스어에서 그녀를 뜻하는 'Elle'와 그녀들을 뜻하는 'Elles'는 공교롭게도 발음이 같다. 이 영화는 미셸의 이야기이면서도 우리 여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대상화, 타자화됨에도 상관없이 우린 연대할 수 있으며, 자유 의지에 따라 행동하고 욕망을 발현할 수 있는 주체라고. 3인칭이 1인칭으로 전위되었을 때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는 영화 <엘르>가 흥미로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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