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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밍 Dec 03. 2017

#66 <프로젝트 X> 불쾌지수 100%

놀라지 마세요. 2011년 작입니다.

*영화 <프로젝트 X>의 스포일러(라고 할 게 있을지는 모르지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티의, 파티를 위한, 파티에 의한  영화. <프로젝트 X> 공식 포스터


 엔딩 크레딧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영화의 여운 때문이 아니다.   


불쾌해서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한 사람이 마이스페이스에 집주소를 올려 자신의 파티를 알리자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게다가 파티는 2만 달러 상당의 손실을 남겼다. <프로젝트 X>는 바로 그 광란의 파티에 대한 내용이다. 핸드 헬드로 담아내 현장감만큼은 뛰어나다.

하지만 난, 88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영화를 몇 번이나 멈춰 볼 정도로 매우 불편했다.


 상식 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대사와 장면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난쟁이가 장난을 쳤다는 이유로 오븐에 가둔다. 개를 풍선에 묶어 하늘로 날려버린다. 위험할지도 모를 정체 모를 액체를 개에게 발라버리기도 한다. 시끄럽다고 항의하는 이웃에 전기 충격을 가한다. 도난당한 마약을 찾으러 온 마약 주인은 화염 방사기로 온 마을을 불 지른다. 이외에도 정상적인 장면이 몇 없다. 절도와 마약, 폭력 정도는 애교 수준이다. 가학적인 장면들은 맥락조차 없다.  


 게다가 영화의 주제는 ‘여자의 맛’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너드의 생일맞이 총각딱지 떼기 프로젝트다. 여성들은 ‘곧 따먹힐’ 존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여성이 등장하면 카메라는 다리, 엉덩이, 가슴 등을 훑는다. 남성들은 낄낄거린다. 곧 자신의 ‘정액 받이’가 될 것이라 상상하며. (남성들의 눈요기를 위해) 딱 붙는 옷을 입고 오라는 말을 듣는 여성들은 영화안에서 물건처럼 소비된다. 불법 촬영을 당하고 각종 성희롱의 피해자가 되지만 이를 나무라는 사람 하나 없다.

 

  언뜻보면 영화 <스물>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스물>에서는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었다. 스물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못났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들 역시 섹스 생각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를 위해 구애를 한다든지 등의 노력하는 장면이라도 있었다. (심지어 스물의 그 셋은 너드도 아니었다.)


 <프로젝트 X>에서는 아니다. 자신들이 파티만 연다면, 여러 여성들과 잘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파티 주최자이자 컵의 친구인 코스터가 사람들에게 파티를 알리고 다닐 때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조차 몰랐는데도 말이다. 세 주인공은 매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너드 중 너드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매력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주인공은 파티에 올 여성들을 자신의 잠재적 섹스 상대자로 인식한다. 여성들의 의중은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그들은 술과 분위기에 취할 것이며, 그들 역시 자신들과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오만하게 넘겨짚는다. 퀸카가 나타나자 생일인 주인공에게 퀸카를 몰아(?)주기도 한다. 생일이니 너가 쟤랑 자라며.


코스터와 컵, 제이비. <프로젝트 X> 스틸컷.


 ‘잘 노는 사람’과 ‘놀 줄 모르는 사람’을 가르는 잣대도 괴이하다. 영화에서는 '잘 논다'는 뜻이 꼭 여자와 관계를 가지고, 술에 거나하게 취해 비상식적인 일을 자행하며 법의 테두리쯤은 사뿐히 무시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고리타분한 헤테로 섹슈얼적인 사고방식도 엿보이는 이 사상은 영화 전체에서 유효하다. 아빠는 아들 컵을 놀 줄 모르는 한심한 사람이라 여긴다. 코스터는 전에 살던 곳과 다르게 지금 이곳은 자신에게 너무 따분하고 재미없는 곳이라며 놀 줄 모르는 친구들을 업신여긴다. 그리고 입버릇처럼 전에 살던 곳과 이곳을 계속 비교한다. 파티가 너무 시끄러워 항의하러 온 '놀 줄 모르는 불쌍한' 주민은 전기 충격기로 잠재워야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서양에서도 '사내새끼가 크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이 통용되나보다. 영화는 이 모든 걸 주인공의 성장담으로 퉁쳐버린다. 컵의 아버지는 난장판이 된 집과, 차, 주변 이웃들의 피해가 막심함에도 불구하고 컵에게 "네가 이런 멋진 일을 해낼지 몰랐어!"라고 아들을 격려한다. 사람들이 얼마나 왔냐며 물어보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주인공 셋은 학교에서 스타가 된다. 사람들은 어쨌든 세상에서 가장 최고의 파티였다고 환호한다.


 물론 영화가 윤리와 사회 규범을 무조건 준수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성 혐오를 비롯한 각종 혐오가 버무려진 이 영화가 어떻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는 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문제는 '인식'이다. 영화는 혐오를 인식하지 못했다. 모르고 싶었던 건지, 정말 몰랐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모른다는 이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지 않는가.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더없이 불쾌하다. '인기가 없는 못난 내 친구의 소중한 첫경험을 위한 분투기' 같은 주제가 여전히 영화의 소재로 쓰이고 있는 것, 아직도 여성은 대상화가 되는 객체에 불과한 것,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불편하다. 누군가는 내게 불편러라 손가락질 할 수 있다. 실제로 혹자는 이 영화를 '씹선비들은 싫어할 꿀잼 영화'라고 감상평을 남기기도 했다. 이는 여전히 이런 소재가 잘 팔린다는 것을 반증한다. 기호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천부인권에 관한 문제다. 또한 '쿨(Cool)'하지도 '힙(Hip)'하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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