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밍 May 09. 2018

#86 <레이디 버드> 크리스틴의 열일곱, 나의 열아홉

리뷰를 가장한 자기고백

 *리뷰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이었을 때가 있었을 거다. 나 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열아홉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공교롭게도 나 역시 천주교 재단의 여자 고등학교에 다녔고(교복도 비슷하다) 서울을 내내 동경하다 결국 서울로 대학을 왔다. 엄마는 내가 제일 미웠던 순간이 고3이라고 말할 정도로 엄마와도 지독히 싸웠다. 그리고 무릎을 탁 칠 정도로 나와 닮아 있는 부분들이 있었다.  




깁스 위의 ‘FUCK YOU MOM’


 영화 내내 크리스틴과 엄마 마리온(로리 멧칼프)은 정말 징그럽게도 싸워댄다. 싸움의 시작은 아주 미약하더라도 끝은 창대 할 지어니. 사소하게 시작한 싸움은 이곳저곳 옮겨간다. 방은 왜 더럽냐, 근처 대학교나 가지 왜 뉴욕까지 가려하냐, 그러다 결국 서로를 할퀴기만한다. 누가누가 더 촌철살인을 날리냐가 목적이 되어버리고 만다.


 나도 그땐 그랬다. 사실 엄마는 대개 옳은 소리만 했는데, 내가 구석에 몰린다고 생각하면 린치를 가해야 한다고도 생각했었다. 딱 레이디 버드처럼. 그래서 가시 돋친 말들을 그렇게 많이 했었다.  


 마리온과 크리스틴이 집으로 함께 가는 길, 좋아하는 문학작품을 들으며 감상에 젖나 싶더니 다툼이 시작된다. 달리는 차에 음악을 틀지 말라는 말로 시작된 싸움은 점점 거세진다. 화가 난 크리스틴은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려버린다. 결국 팔에 깁스를 하게 된 크리스틴은 깁스에 'FUCK YOU MOM'이라 적는다. 사실 진심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글씨는 크지도 않다. 한 귀퉁이에 적었을 뿐이다. 정말 싫지만 또 그렇게 싫지 않은 게 엄마이기 때문이다.  




미운 열일곱. <레이디 버드>스틸컷




“문화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 크리스틴  

 내가 살던 도시 광주는 따분한 도시였다. 매달 구독하는 잡지에서는 서울에 있는 맛집과 카페, 서울에 사는 사람들, 서울에서 열리는 축제들, 서울에서 하는 공연이 전부였다. 흥미로운 모든 게 서울에 있었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시간이 바뀌는 날, <MBC 가요대제전>의 새해 카운트다운을 보고 있는데 딱 그 시간에 맞춰 <빛고을 광주>가 나오는 식이었다. 서울에는 '시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도 부러웠다. (얼마나 놀 곳이 많으면!) 당연히 난 서울을 동경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가 가득한 도시. 공연도 마음껏 볼 수 있고, 광주에서 상영하지 않는 독립 영화도 시간만 맞추면 볼 수 있는 곳. 온갖 멋진 사람들만 가득한 그곳에서 꼭 살고 싶었다.  


 크리스틴(레이디 버드/시얼샤 로넌) 역시 고향인 새크라멘토를 언제나 떠나고 싶어 한다. 재미있는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며 자신의 인생은 너무 따분하다고 말한다. 고향을 떠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뉴욕이나 동부 쪽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다. 하지만 집안 사정도 좋지 않고 성적도 좋지 않다. 엄마와 아빠는 근처에 있는 데이비스 대학교를 추천하지만 크리스틴은 고향으로부터, 집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어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조건 서울로 대학을 가야만 서울에서 살 수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인서울을 할 거라고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부모님은 물론 서울의 학교도 좋지만 광주에 있는 교대나 국립대를 넌지시 권하곤 했다. 게다가 수능을 생각보다 잘 보지 못해 원서를 쓸 동안에는 매일을 싸웠다. 심지어 국립대에 지원할 경우 4년 전액 장학금과 기숙사 제공 조건이 따라왔다. 이런, 설득이 더 어려워졌다. 믿을 건 하나였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이 말을 마음 속에 새긴채 부득부득 싸워 결국 서울로 학교를 올라올 수 있었다.


<레이디 버드> 스틸컷




지나고 보니 생각나는 차창 밖의 풍경들  

 열아홉의 기대는 틈 하나 없이 완벽했다. 서울로 대학만 가면 창창한 미래가 내 눈앞에 펼쳐질 거라 생각했다. 명동과 홍대, 가로수길을 거닐며 쇼핑을 하고, 매일 맛집과 카페를 순례하는 삶. 가고 싶던 공연을 모두 보고 문화생활을 즐기는 삶.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삶은 돈이 아주 많아야 하는 삶이었다. 게다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매일 부어라 마셔라 바빴고, 가끔 있는 시험만이 각성제의 역할을 했다. 집도 문제였다. 서울의 월세는 사악했다.  광주에서 내 방만큼의 시설을 갖춘 집을 구하려면 한 달에 70-80만 원이 들었다. 게다가 서울은 너무나도 추웠다. 기대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역설적이게도 떠나 있으니 내가 좋아하던 광주의 모습들이 테가 나기 시작했다. 기대의 틈에 향수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터미널이나 기차역에 내리면 확연히 달라지던 공기, 봄 햇살의 높은 채도, 얇은 비눗방울 안에 들어있는 듯한 보송보송한 공기, 여름의 층층이 겹쳐진 노을과 하늘의 다양한 얼굴, 겨울이 끝날 때쯤 뜬금없이 불어오는 봄바람, 느리게 지나가는 계절들, 정겨운 사투리와 푸짐한 인심, 자주 가던 카페와 학교 주변 밥집들. 사실 난 광주를 그렇게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광주의 많은 면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마치 크리스틴이 뉴욕에서 새크라멘토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남은 서러운 사실들  

 지나고 나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자신에게 화난 엄마가 공항 안까지 바래다주지 않는 걸 보며 너무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엄마는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을. 집을 떠나는 딸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주지 못했던 이유들을. 크리스틴은 이제야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계란 요리를 하지 않게 하고, 운전을 가르쳐 주지 않던 것들은 아직 자신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었다는 걸. 크리스틴은 이제 더 이상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하지 않는다. 엄마와 아빠가 준 이름, 크리스틴으로 소개한다.  


 이제 점점 더 서러운 사실들이 다가올 것이다. 나의 아빠는 광주에 내려갔다 서울에 올라갈 때마다 매번 바래다주는 데, 엄마는 그렇지 않았다. 귀찮아서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는 내가 떠나는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어서였다.


가족여행을 하다 갑자기 서울로 올라가야 해서 여행지에서 버스를 타고 올라온 적도 있다. 아빠는 터미널로 가는 내내 꼭 가야만 하냐며 몇 번을 채근하다 이내 입을 닫았다. 그렇게 침묵한채로 버스 출발 직전에 버스로 올라와 수차례 내 안전벨트를 점검해주고, 내 짐이 떨어지지 않게 하려 몇 번을 짐을 올렸다 내렸다 했다. 그때 그 꿋꿋한 손짓이 얼마나 많은 말을 담고 있었는지는 나중에야 알았다.

가득한 아쉬움과 사랑과 걱정이 한데 섞인 그 손짓. 가끔 아빠의 손을 보면 그때가 생각나 서러워진다.


 이 밖에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일들은 많다. 고향에 가기 전날 통화에 평소보다 들뜬 부모님의 목소리와 텅 빈 내 방을 떠나며 부모님의 마음에 이입될 때, 오랜만에 간 고향집에서 이제 난 가족보다는 손님이라는 느낌을 여실히 느낄 때 등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점점 무겁게 다가오는 순간들을 느끼며 그렇게 커나간다.



<레이디 버드> 스틸컷



 영화를 굳이 분류해보자면 <레이디 버드>는 성장영화에 가깝다. 하지만 성장의 과정을 관망하거나 질책하지 않는다. ‘그땐 그랬지’식으로 성장의 모든 지점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는 점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이다.

사실 열아홉을 훨씬 지나버린 지금의 나도, 대학에 들어간 크리스틴도 영원히 완전할 수 없는 존재다. 여전히 사소한 걸로 엄마와 다투고, 남들과 다르고 싶은 열망이 아직 존재한다. 내가 열아홉일때는 스물을 간절히 바랐다면 이제는 그 대상이 서른으로 옮겨간 정도다.

그래서 영화는 과정에 집중한다. 가득한 애정으로 당시의 수만가지 감정의 갈래를 그려낸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찬란했던 그때 그 날들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새크라멘토에 바치는 러브레터라는 그레타 거윅 감독의 말처럼, <레이디 버드>는 내내 따뜻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명당>은 추석영화로 좋겠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