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어느날 갑자기
시계를 보니 오늘도 새벽 두 시였다.
매일 2~3시까지 야근을 하는 삶을 영위한지는 1년이 넘었지만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주변에서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정도로 힘들지는 않다며 손사래쳤지만 나의 어느 한 부분은 곪아가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평소처럼 야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하필이면 아무도 남아있지 않아 홀로 사무실에 앉아 있던 날 갑자기 속에서 화가 치솟았다. 더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마침 이어폰에서는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쇼팽 발라드 1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피아노를 치고 싶다는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피아노 학원을 그만둔지 15년이 넘은 지금 말이다.
어린 날의 어느날
피아노를 시작한 건 여섯 살 여름날이었고, 피아노 학원을 그만둔 건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어렸을 때는 으레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그렇듯 엄마 손을 잡고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다. 엄마는 꼭 딸을 낳으면 피아노를 배우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피아노를 배우는 5년 동안 우리 가족은 두 번의 이사를 했지만 엄마는 가장 먼저 주변에 괜찮은 피아노 학원부터 찾아 등록해주시곤 했다. 그렇게 체르니를 치고, 소곡집과 명곡집을 치고, 소나티네와 소나타를 치면서 책을 하나씩 끝내며 살았다. 그러다 열한 살이던 어느날 나는 갑자기 피아노가 치기 싫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은 정말 이유가 있었다. 시에서 주최하는 건치 대회에 학교 대표로 참가한 나는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의 응원을 받아 2교시가 끝나자마자 대회장으로 갔다. 대회장에서 여러명의 치과의사 선생님들한테 입을 '아'하고 벌리고 '이'하고 벌리며 내 건강한 치아를 뽐냈는데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내게는 조금 버거운 일이었다. 게다가 각종 조명으로 대회장이 더웠다. 더위에 허덕이며 지쳐있을 쯤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1등이었다. 나는 집에 가지도 못한채 사람들에게 붙들려 보도 사진을 또 팡팡 찍었다. 그렇게 지친 몸으로 집에 도착하고나니 피아노 학원에 가기 너무 싫은 것이다. 엄마에게 오늘 피아노 학원을 빠지면 안되냐고 물어봤지만 엄마는 삼십분만이라도 얼른 다녀오라며 거절했다. 그런데 그날은 정말 가기 싫은 것이다. 나는 누워서 엄마한테 꼬라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다가 이제 피아노를 치기 귀찮고 싫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러자 엄마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피아노가 치기 싫고 오늘도 정말 가기 싫은 거면, 앞으로 평생 가지 않을거야?"
때마침 피아노 치는 게 권태롭던 나는 솔깃했다. 그리고 어린 날의 나는 엄마가 말하는 '평생'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그렇게 나는 피아노 학원을 아주 그만두게 되었다.
후회 막심
피아노가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였으므로 나는 잘 살았다. 그런데 문제는 고등학교 때였다. 당시 유행하던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를 보고 피아노에 아주 꽂혀 버렸다. 우리 집에 있던 피아노는 이미 사촌 오빠네로 건너간지 오래라 피아노를 치기 위해서는 피아노 학원을 가야만 했다. 나는 엄마에게 성적을 빌미로 협상을 시도했다. 하지만 하나도 먹히지 않았다. 엄마는 전에 내가 다시는 피아노 학원을 다니지 않겠다고 약속한거 아니냐 했다. 나는 그제서야 11살에 들었던 엄마의 '평생'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그때 오바를 조금 보태서, 피아노를 치지 않으면 못견딜 것 같았다. 다행히도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방치된 피아노가 꽤 많았다. 나는 거기있는 피아노라도 쳐야만 했다. 그래서 아침 첫차를 타고 등교하기 시작했다. 맨날 학교에 지각해 복도에 서있었던 내가 말이다. 쉬는 시간에도 강당으로 달려가 피아노를 쳤다. 음악 수행평가를 볼 때는 사촌오빠 집까지 들어가서 연습했다. 새벽에 강당에서 피아노를 치고, 긴 쉬는 시간에도 피아노를 치고, 청소 시간에 내 몫의 청소를 마치고 피아노를 치고, 석식을 빨리 먹고 남은 시간에 피아노를 쳤다. 그렇게 나는 피아노를 열렬하게 사랑했다.
다시 앉은 피아노 앞
지금 내게 필요한 게 바로 피아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수없는 이유들로 힘든 마음을 달래기 위해 피아노를 치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걸 하자. 악보도 처음부터 봐야겠지만 다시 피아노를 치자. 그러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마음이 괜찮아질 거야.
나는 상담도 하지 않고 냅다 피아노 학원 등록부터 했다.
그리고 다음 날, 평소 같으면 야근을 하고 있을 그 시간에 난 꿈처럼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