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뷔시의 <달빛>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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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중 <달빛> L.75
https://youtu.be/97_VJve7UVc
작년 말, 피아노 학원에서 하는 작은 연주회에 참여했다. 거의 고막 테러의 수준이라 참가하지 않으려 했지만 차홍 같은 선생님 말솜씨에 홀렸다. 후보곡으로 정했던 다른 곡들보다 악보가 널널한 드뷔시의 <달빛>으로 결정하고, 연주회가 세 달 정도 남았을 때 연습을 시작했다. 세 달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착한 악보에 그렇지 않은 태도
지나고서야 아는 일들이 있다. 악보가 단순하다고 쉬운 곡은 아니라는 것. 피아노를 전공하거나 오랫동안 쳤던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곡들을 더 어려워한다는 것. <달빛>은 다른 곡들보다 음표가 없어서 선택했는데, 그만큼의 여백을 온전히 내 힘으로 채워서 표현해야 했다. 악보를 더듬거리며 뚱당 거리기도 바쁜 내게, 피아노로 감정 표현을 해낸다는 건 또 다른 세계의 문제였다.
생각보다 악보를 보는 것도 쉽지 않았따. 무려 다섯 개의 플랫(b)이 있고 쉬운 박자도 아니었다. 8분의 9박자 악보를 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박자에서는 한 마디를 세 덩어리로 나누어 세 박자씩을 세야 하는데 어려워서 혼났다. 차라리 빠르고 음표가 많은 곡이었다면 치기는 수월했을 수 있는데, 느린 곡이라 박자에 유념하면서 쳐야만 했다. 잠시 한눈을 팔면 박자가 꼬이기 십상이었다.
뜻밖의 성실함 +1
어려운 만큼 노력이 필요했다. 약속이 없는 날엔 무조건 피아노 학원에서 밤까지 피아노를 쳤고, 주말에는 짬이 나면 약속 가기 전이라도 꼭 들러 손이 굳지 않게끔 했다. 어렸을 적 싫어하던 하농을 열심히 치고, 매일 조성진 버전의 <달빛>을 들었다. 레슨을 한 후에는 선생님 말씀을 모두 받아 적어 핸드폰 메모장에도, 악보에도 정리해놓았다. 그렇게 정리한 메모가 30개는 되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보러 부산에 내려가서는 영화 사이 남는 시간에 연습실을 빌려 연습할 정도였다.
'성실함'은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신기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불안함이 결국 동력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결국, 두 번의 미스터치는 있었지만 연주회를 잘 마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