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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너무 어려운 이름, 레가토(Legato)

프란츠 슈베르트 즉흥곡 2번, op 90

by 스밍



프란츠 슈베르트 즉흥곡 2번, op 90
짐머만 ver. : https://youtu.be/L4B1IJmjsyo
머레이 페라이어 ver. : https://youtu.be/zF02p0_0_uQ


레슨 곡을 고를 때마다 선생님과 상의를 하며 고르는 데, 난이도에 대해 서로 생각이 다르다. 난 음표가 가득하지 않거나, 들었을 때 빠르지 않은 곡들을 대체적으로 쉽다고 생각한다면 선생님은 악보도 악보지만 표현력에 좀 더 방점을 둔다.


이번 레슨 곡인 슈베르트 <즉흥곡 2번>을 고를 때도 그랬다. 장조장조한 멜로디인 데다 악보가 널널해 보여 단숨에 하겠다고 했었다. 후보로 둔 다른 곡도 있었는데(음표가 꽤 많은) 선생님이 이 곡이 조금 더 어려운 곡이라고 했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이미 곡을 고른 자는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리고 악보가 어느 정도 손에 익을 무렵 고난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레가토(Legato)가 내 손목을 잡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널널한 악보(라고 생각했었지)


어렸을 땐 이렇게 레가토*를 면밀히 톺아본 적이 없었다. 그저 정박에 맞춰 우렁차게 쳤던 기억이 전부다. 쉼표와 피아노, 포르테 정도만 신경 쓰고 얼른 이 곡을 마무리해서 다음 곡으로 넘어가는 게 목표였던 어린이였다. 사실 피아노를 계속 쳐왔다면 시야가 많이 달라졌겠지만 17년이 지나 다시 시작한 내 시야는 딱, 그 초등학생과 같았다. 난 어렸던 나처럼 레가토를 종종 잊은 채 마치 행진곡처럼 치기 시작했다. 아주 우렁차게.


https://www.youtube.com/watch?v=FV34SH-wLfk

참고 영상 : 어렸을 적 피아노 학원을 다녔던 사람이라면 뜨끔할만한, 피아니스트 랑랑의 소나티네 1번. 1:57부터 우리가 치던 모습이 나온다.


레가토(Legato) : 계속되는 음과 음 사이를 끊지 않고 원활하게 연주하는 것.


게다가 레가토를 치기엔 내 손은 너무 짧고 뭉툭하고 둔했다. 물 흐르듯 치는 건 바라지도 않지만, 집중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갑자기 음 하나씩이 튀어나오곤 했다. 특히 상대적으로 힘이 좋은 엄지, 검지, 중지 손가락이 그랬다. 반면 힘이 상대적으로 약한 약지와 새끼는 자주 미끄러졌다. 박자는 꼬여가고 절뚝거렸다.


그런 날 보고 선생님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표현들로 도움을 주시기 시작했다. 영롱한 하프의 소리처럼, 하나의 활로 켜는 현악기처럼, 소리는 또렷하되 손목에는 힘을 푼 채로. 또한 한 번 녹음을 해보는 건 어떻냐고 말씀하셨다. 결국 녹음본을 듣는데 귀가 뚫릴 뻔했다. 손가락 다섯 개가 자기주장만 하고 있었다. 하프 소리, 현악기 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연습.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출퇴근길엔 여러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듣고(좌절하고), 하프 연주를 듣기도 했다. 유튜브로 레가토를 검색해 수많은 영상을 보고 배우며 동시에 나만 어려운게 아닐거라는 위안도 받았다. 슬슬 빼먹기 시작했던 하농을 다시 연습하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칠 땐 해리포터가 패트로누스를 불러내는 마음으로, 기쁘고 행복한 생각들만 떠올렸다. 어느 날은 보리밭이 드넓게 펼쳐진 낮 두 시의 풍경에, 어느 날은 나비가 날아드는 튤립 벌판에 있었다. 온갖 평화롭고, 볕이 들고, 안락하고, 산뜻하고, 살랑거리는 곳을 옮겨 다니며 피아노를 쳤다.


레가토에서 막혀 더 이상 나가지 않던 레슨도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나아가야 할 길은 멀다. 여전히 우렁차다. 그래도 레가토의 백분의 1을 이제야 알기 시작한 것 같다. 계속 계속 치다보면 언젠가는 1할 정도에 닿는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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