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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밍 Sep 08. 2020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산티아고'술'례길 1일차(2)




가장 첫 번째 글 : #1 산티아고'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2 
이전 글 : #4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https://brunch.co.kr/@2smming/55


산티아고 순례길 1일차
2018. 5. 14. 월요일
생장(Saint-Jean-Pied-de-Port) -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27.1km


엎친데 덮친 비 

 여전히 이 넓은 산에 사람은 나 혼자인 것 같았지만 론세스바예스 표지판을 발견하니 기분이 훨씬 나았다. 그런데 하늘을 뒤덮은 나뭇잎 사이로 뭔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설마 비일까 싶어 손바닥을 쭉 하늘 쪽으로 내밀었다.


툭 - 툭 -


 정말 비가 오고 있었다. 너무 황당해 그 자세 그대로 멈췄다. 비라니, 지금 비가 오고 있다니. 첫날인데, 비라니. 아무리 내가 아침에 날씨도 체크하지 않고 출발했더라도, 그래도 비라니. 믿을 수 없었다. 단순한 소나기의 느낌도 아니었다. 아주 오랫동안 가열차게 내릴 장대비가 틀림없었다. 별로 쓸 일이 없을지 알았던 우비를 첫날부터 꺼내야만 했다.


분명 이렇게 구름이 가득했는데, 오르는 것에 연연해 미처 하늘을 살피지 못했다


 비는 점점 거세지기 시작해 바람과 함께 나를 때리고 밀쳤다. 다리에 힘을 주고 걷지 않으면 자꾸 헛군데를 짚었다. 젖은 낙엽들은 자꾸 미끌거려 까닥하다가는 발을 삘 수도 있었다. 사방에서 뿌리는 비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튼튼하지만 통풍은 되지 않는 우비 사이로 후덥지근한 땀과 비가 뒤섞여 흘러들어 갔다. 움직일때마다 추적거리는 느낌이 불쾌했다. 빵 말고는 먹은 게 없는 몸인데 체력 소모가 심했다. 결국 온몸의 체력이 정확히 0을 가리켰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초코바는 있다

 맘 같아서는 드러눕고 싶었다. 하지만 등산화에는 이미 진흙이 범벅이고 신발 사이로 비가 들이친 상태였다. 신발도 벗지 못하고, 제대로 앉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하게 나무에 기대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약 4년 전, 프랑스 아를에서 만났던 순례자가 생각났다. 당시에도 산티아고 순례길에 가고 싶어 많은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그분이 비상식량을 챙기지 않아 한 번은 걷는 중에 쓰러질 뻔했다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한 순간 생각이 스쳤다. 한국에서 짐을 쌀 때 그 이야기를 곱씹으며 뭔가를 챙긴 것도 같다. 얼른 몸을 일으켜 가방 구석구석을 뒤졌다. 가방의 작은 주머니 안의 속주머니에 녹은 채 굳은 초코바와 하루 견과가 꾸깃꾸깃 숨겨져 있었다.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는 산길


드디어 도착

 마음 같아서는 그냥 여기서 우비 덮고 자고 싶었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오늘 가려고 하는 론세스바예스의 알베르게는 공립 알베르게 하나인데, 정원이 모두 다 차면 5km를 더 걸어 다른 알베르게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구글맵의 예상 도착시간은 이미 오후 다섯 시 삼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스피드가 필요했다.


 템포가 빠른 노래를 틀어놓고 박자에 맞춰 발을 내딛었다. 몸이 솜처럼 푹푹 퍼지면 악과 가까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몸을 억지로 이끌었다. 멘탈이 나간채 혼자 걸으니 혼잣말도 늘었다. 몇 시간 사이에 몇십 년 치의 혼잣말을 쏟아내던 와중 도로 같은 게 보이기 시작하더니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갔다. 정말 오랜만에 본 사람이었다. 자전거는 얼마 가다 끽- 멈추더니 다시 내쪽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더니 내게 소리쳤다.

 

"Do you have any problem? Are you okay?"


나는 소리쳤다. 안 괜찮고 배가 고파서 죽기 직전이라고, 그 사람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더니 다 왔다고 말하고는 다시 쌩쌩 달려갔다. 뭐래 진짜, 지는 자전거 탔다고 그러나? 하며 고개를 드니 정말 눈앞에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가 있었다. 

드디어 도착이었다.


처음 만난 순례자 정식

 샤워와 모든 옷을 손빨래 하니 기운이라고는 1도 없었지만, 생존을 위해 갓 태어난 송아지 새끼마냥 다리를 움직이며 저녁을 먹으러 향했다. 여러 순례자들과 함께 순례자 정식을 먹는 자리였다. 원래 이런 자리에서 먼저 말을 꺼내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영어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수능 외국어 영역 시험에서 빈칸 추론 문제를 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수능 당시 빈칸 추론 문제는 '빈칸 상상'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난이도가 극악했다.) 분명 소리는 들리는데, 소리만 들리는 그런 느낌 . 들어온 소리가 뇌로 갈 동력이 없어 자꾸만 흘려보내지는 것 같았다.


처음 먹는 순례자 정식, 힘들었던지 이날 음식 사진은 오직 이 사진뿐이다.


 다행히 음식이 들어가니 그제야 귀가 트여가기 시작했다. 그들도 눈치를 챘는지 괜찮냐며 말을 붙였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이 길을 왜 걷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특히 오늘 루트의 끔찍함을 이야기하며 격한 공감을 나눴다. 어제(13일)에 출발해 오리손에서 론세스바예스로 온 사람들도 있었고, 나처럼 오늘 출발해 발카를로스 길로 생장-론세스바예스를 한 번에 걸어온 사람들도 있었다. 아스팔트 길에 고통받다가 중간에 택시를 타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개중에는 나처럼 구글 맵 때문에 고생을 꽤나 한 사람도 있었다. 순례길 첫날의 고통은 처음 만난 사람들을 금방 끈끈해지게 만들었다.  


 음식이 들어가니 이제 와인이 눈에 보였다. 홀짝홀짝 계속 마시고 있으니 사람들이 옆에 남은 와인병을 내게 주었다. 필요하면 자기가 더 받아주겠다며 양껏 먹으라는 말도 덧붙였다. 돈을 더 내야 하냐고 물으니 전혀 아니라며, 순례자 정식에는 보통 와인이 무한 제공된다고 했다. 세상에, 여기가 바로 술천국이구나. 酒님의 현신이 바로 여기, 이 길에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에 온 내가 너무 기특했다. 앞으로 펼쳐질 행복한 술파티가 너무 기대돼 배 한쪽이 찌르르 간지러웠다. 와인은 먹어도 먹어도 짜릿했다. 이렇게 맛있는 와인을 남길수야 없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조셉과 함께 남은 와인병을 모두 싹 비우고서야 자리를 나섰다.


 들뜬 기분에 알베르게를 쏘다니다 자판기를 발견했다. 맛있어 보이는 캔맥주가 거기 있었다. 안 그래도 알콜이 부족하던 차였는데 지금 딱이었다. 침대로 돌아와 한 캔을 따 마시며 폭풍 같던 하루를 일기장에 옮겼다. 슬슬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일기장의 글씨는 취한 기분만큼 구부러졌다. 글씨는 일기장의 위로 아래로 마구 내달렸다. 결국 '아 - 취한다 - '를 마지막으로 다이어리를 덮고 잠에 들었다.


그러고 나서 다음날 알았다. 내가 먹은 맥주는 '무'알콜 맥주였다는 걸.


무알콜 맥주인지도 모르고 좋다고 찍은 사진

 

 오늘도 술람찬 하루, 그리고 사실 여긴 #산티아고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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