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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밍 Sep 06. 2020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산티아고'술'례길 1일차(1)



가장 첫 번째 글 : #1 산티아고'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2 
이전 글 : #3 비극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4


산티아고 순례길 1일차
2018. 5. 14. 월요일
생장(Saint-Jean-Pied-de-Port) -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27.1km
드디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시작할 때의 사진(아직 행복했을 때)

 

산티아고 순례길의 시작

 대망의 첫날!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아 알베르게(순례자 숙소)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나왔다. 물을 사려고 보니 연 곳이 없었다. 뭐, 슈퍼는 어디든 있겠지 생각하며 걷기 시작했다. 출발을 늦게한 탓인지 길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순례자는 아예 없었고 가끔 마을 주민들이 내게 다가와 'Buen Camino'라고 인사를 건네며 나폴레옹 길로는 갈 수 없다는 걱정 어린 이야기를 전했다. 길 위에서 'Buen Camino'를 듣다니, 정말 산티아고 순례길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산길로 접어들자 놀라울 만큼 난 혼자였다. 높은 나무들이 솟아있는 사이로 어떠한 부스럭거리는 발소리도, 등산 스틱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도로의 차바퀴 소리가 미약하게나마 아주 멀리서 들려올 뿐이었다. 산티아고에서는 노란 화살표만 따라가면 절대 길을 잃지 않는다던데, 조금만 노란 화살표가 보이지 않아도 이 길이 맞는지 조바심이 났다. 그리고 목도 마르기 시작했다.


곳곳에 있는 노란 화살표와 조개 모양 표시

 

넌 배고픔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지

 다행히 작은 마을이 나왔다. 표지판에는 불어와 스페인어가 함께 쓰여 있었다.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 사이의 마을이었다. 마트에서 물과 조그만 빵을 사고 조금 걸으니 말로만 듣던 바르(카페 겸 bar, 음식과 음료를 먹을 수 있는 곳. 순례길 곳곳에 있다.)가 나왔다. 순례길에서 맨 처음으로 마주친 바였다. 하지만 시계를 보니 점심을 먹기엔 아직 일렀다. 조금 배고프긴 하지만 더 빨리 가는게 괜찮을 것 같았다. 다음 바에서 쉬기로 하고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그땐 몰랐다. 이게 비극의 시작일 줄은.  


 아스팔트 길과 산길을 번갈아 걷기를 몇 시간째, 길 위에는 어떠한 바도 없었다. 점심시간은 훌쩍 지났고 배는 고프다 못해 감각을 잃었다. 이 산만 넘으면, 이 도로만 끝나면 문을 연 가게가 있겠지 매번 기대했지만 정말 없었다. 분명 순례길에서는 바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고 읽었었는데 어딜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커다란 표지판을 발견했다. 누가 봐도 BAR가 아주 크게 쓰여진 게 무조건이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BAR


 귓가에 상투스가 울리고 절로 소리가 나왔다. 드디어! 점심을 먹을 수가 있다니! 혼잣말도 막 나왔다. '하느님, 하나님, 부처님, 알라님 진짜 감사합니다. 착하게 살게요.'


하지만 아니었다. 바는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아무 바닥에 털썩 앉았다. 아까 마트에서 왜 그렇게 작은 빵을 골랐던 건지, 가방이 무겁다며 왜 물은 하나만 골랐던지 한스러웠다. 그래도 살아야 하니 빵을 꺼내 아주 여러 번 꼭꼭 씹어 먹었다. 부디 하나도 빠짐없이 에너지원이 되기를 희망하며.


R=VD 나는 목이 마르지 않다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다. 올라도 올라도 끝없는 산길은 준비되지 않은 내 몸뚱이에겐 벅찼다. 길들여지지 않은 등산화에 눌린 발들은 비명을 질러왔고, 갑자기 무한 펌핑을 하고 있는 심장과 허벅지가 내게 한 바가지 욕을 하고 있었다. 배고픔에 지친 장기들은 아주 아우성을 쳤다. 몸이 이렇게 힘든 건 차라리 나았다.


 목마름이 정말 고통스러웠다. 슈퍼든 바든 아무것도 찾지못해 먹다 남은 200ml 정도의 물과 함께 피레네를 넘어야 했다. 숨은 턱끝까지 찼는데 물은 마실 수 없었다. 가방에 넣어놓은 물이 출렁거릴때,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넘어가는 거라며 최면을 걸었다. 침도 여러번에 나눠 삼키고 나는 목마르지 않다라고 여러번 읊조렸다. 이렇게 참고 참다 도저히 못 견디겠을 때 그제야 생수 뚜껑을 열어 혀만 축였다. 일전에 먹은 빵이 목구멍에서 내려가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와중에 너무 예뻤던 풍경들


구글맵의 배신 

 정말 론세스바예스가 간절해졌다.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지 구글 지도를 켜 지금 위치를 찍어보았다. 분명 아까 세 시간만 더 가면 된다고 했으니까 얼마 남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이런, 몇 시간 전과 지금이 바뀐 게 없었다. 2~3시간은 걸어왔는데 아직도 세 시간이 더 남아있었다. 30분 정도 걸은 후 구글맵을 켜도 남은 시간은 변함이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길을 따라가는데, 갑자기 늪지대가 나오기도 하고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가 나오기도 했다. 점점 내가 맞는 길을 가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한 번 구글이 안내해주는 길 말고 다른 길로 걸어가 보았다. 그런데 저 앞에서 딱딱 거리는 등산 스틱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사람이, 순례자가 그곳에 있었다! 앱을 끄고 희미한 스틱 소리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례자의 속도를 따라가기는 역부족이었다. 이내 스틱 소리는 사라지고 난 다시 황망히 혼자 남았다.


 혹시 몰라 한국에서 'god-길'을 혹시 몰라 다운로드 받아왔었다. 걷다가 내 미래가 막막해지면 들을 참이었지만 지금 상황과 곡이 절묘했다. 특히 후렴구의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부분은 안 따라 부르고는 못 배겼다. 아무도 없겠다 온 산이 울리게 쩌렁쩌렁 열 번쯤 불렀을쯤. 드디어 론세스바예스 표지판이 나타났다. 정말 길을 잘못 들었던 게 확실했다.


까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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