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 인터메조 op.118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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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 인터메조 op.118 - 2
조성진 ver : https://youtu.be/dxiMbPo7iGU
눈앞에 풍경이 펼쳐지는 연주들이 있다. 브람스의 인터메조 118번 중 2번처럼. 이 곡을 가장 처음 들은 건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공연 앵콜이었다. 공연이 끝났는데도 박수가 한참 쏟아져, 피아니스트는 세 번 정도 다시 무대에 나와 인사를 하다 결국 의자에 앉았다. 순식간에 사람들은 숨을 흡- 하고 들이마시듯 조용해졌다. 그렇게 완벽한 고요에서 연주가 시작됐다.
첫마디를 듣자마자 이 곡을 오래도록 좋아할 거라는 엄청난 확신이 들었다. 나를 단숨에 초봄의 바다께로 데려다 놓고는 마구 일렁이고 있었다. 눈앞에서 파도는 잔잔하게 철썩거리고 있었고, 바다 너머 멀리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한 번은 작은 파도가, 한 번은 저 멀리서 오는 깊은 파도가 번갈아가면서 밀려왔다. 음들은 윤슬처럼 반짝거렸다. 음들이 지나간 자리에도 모래를 손에 쥐었다 놓으면 반짝거리는 모래알만 남듯, 여음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엔 이 느낌을 잊어버릴까 한 시간이 넘는 거리에도 이어폰을 끼지 않았다. 그때는 피아노를 배우기 전이라 막연하게 언젠가는 꼭 이 곡을 쳐야지 다짐했었다. 그리고 피아노를 다시 시작한 지 1년이 넘었을 무렵, 드디어 인터메조를 치게 되었다.
오랫동안 좋아해 왔던 곡을 친다는 건 장점과 단점이 분명하다. 좋은 점은 악보를 볼 때 다른 곡들보다 훨씬 수월하다는 점이다. 처음 보는 악보라도 더 빨리 읽을 수 있고, 비교적 빨리 치기 시작할 수 있다. 멜로디 라인도 금방 보여 레슨에도 속도가 붙는다. 많이 들은 만큼 귀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단점은 마스터피스만 내가 귀에 박히게도 들었다는 점이다. 내가 치는 곡과는 멀어보인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점점 더 크게 느껴지고 좌절도 그만큼 크다. 연주자가 칠 때는 이렇게 어려운 곡은 아닌 것 같았는데, 난 매 마디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다.
하필이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바로 연주자들이 각자의 파도를 만들어내던 부분. 들을 때마다 감탄했던 부분은 나로서는 매 순간 고민에 봉착하는 때로 다가왔다. 손가락 끝으로 파도를 만들어내려면 크레센도(점점 크게)와 데크레센도(점점 여리게)의 기호를 잘 살려 연주하는 게 중요한데, 커지는 건 힘으로 누른다 쳐도 작아지는 건 보다 섬세한 테크닉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테크닉이란 내게 없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것도 한 몫했다. 손가락은 음을 읊는데도 정신없어 자주 악상을 잊었다. 한창 치다가 아 맞다! 데크레센도! 하는 순간 이미 지나간 지 오래였고, 다시 크레센도로 연주해야 하는 구간이었다. 어쩔 수 없는 나는 크레센도와 크레센도와 크레센도로 연주하고 있었고, 이제 더 이상 커질 소리도 없었다.
요즘 연주에 조금씩 감정을 담아내려 움찔거리기 시작했는데, 이 또한 복병이었다. 감정을 싣는 순간 곡의 밸런스는 우당탕 무너졌다. 흘러넘치게 담아버린 감정은 추스를 수도 없었다. 과한 감정에 박자는 점점 더 기괴해지는데 이성이 지배하는 손은 미처 감성을 따라가지 못해 절고 있었다. 인터메조 뽕에 거하게 취해버린 난 다음 마디도 자주 잊었다. 하지만 벅차오른 이 감정을 멈출 수는 없지. 찢어진 옷을 기우듯 음과 박자와 악상을 아무거나 짚어가면서 새로운 노래를 만들고 있었다. 브람스가 무덤에서 뛰쳐나와도 할 말이 없었다. 끔찍했다.
별 수 있나. 연습만이 살길이다. 온전히 내 파도를 만들 수 있는 날까지 그렇게 꾸준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