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토 - #순간수집일기 프로젝트
21.1.19 #순간수집일기
어릴 때 피아노를 배웠던 사람이라면 하농, 체르니, 소나티네, 소곡집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는데, 치는 재미로 따지자면 소곡집과 소나티네가 훨씬 이었고 하농은 늘 내 관심 밖이었다. 너무 지루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내 마음도 모르고 모든 책에 같은 개수의 연습 동그라미를 그려주셨다. 하지만 난 하농 대신 소나티네를 한 번 더 치고 하농 책에 빗금을 긋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하농을 다 끝낸 후에 다시 집어 들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약 15년 만에 다시 간 피아노 학원의 첫날, 난 악보 그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은 박자와 멜로디로 모차르트 소나타를 조용히 거대하게 말아먹었다. (모차르트가 관을 박차고 나올 듯했다) 파들파들한 끝 음까지 마치자 선생님이 건네준 건 다름 아닌 하농. 그 순간에 난,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표지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게 내심 반갑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동시에 하농의 존재 가치를 깨달았다. 하농은 기본 중의 기본이자 내가 계속 안고 가야 할 거라는 걸. 싫어도 꾸준히 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걸. 그래서 내 안에 없는 성실함을 박박 긁어모아 최대한 성실하게 한 곡씩 치고 있다. 어릴 때 그 방식 그대로 동그라미를 그려가며. 여전히 넷플릭스 없이 사이클을 타는 기분처럼 길고 따분하긴 하다. 손가락 번호가 꼬여버리기라도 하면 당장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가끔은 몸을 배배 꼬아가면서까지 꾸준한 건 적금을 넣는 마음에 가깝다. 작고 얇은 시간을 한 겹씩 쌓아가다 뒤를 돌아보면 그래도 지금보다는 좀 더 날렵하고 섬세한 손가락과 함께일 거라고,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네 번째 손가락으로도 딴딴한 소리를 낼 수 있을 거라고, 날아다니는 손가락까지야 아니더라도 전체적으로 균일한 소리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소망한다.
그래서 난 오늘도 다섯 번째 동그라미에 빗금을 긋는 순간을 기뻐하면서 하농을 친다.
오늘의 ㅎ = 빠지지 않고 하농 연습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