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뮤지컬 <위키드> 리뷰 - 두 번째 : 관계와 성장
처음 글 : 갑자기 찾아온 덕통사고
※이 글은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 및 해석과 뮤지컬 <위키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소제목은 모두 한국판 <위키드>의 넘버 혹은 대사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당황스러운 너의 정체 - <What is this feeling(이 낯선 느낌)>
글린다는 친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인기 많은 친구고, 엘파바는 남들과는 많이 다른, 초록색 피부를 가진 괴팍한 사람이다. 그리고 엘파바와 글린다는 서로 만나자마자부터 매우 싫어한다. 싫어하는 걸 넘어서 혐오하는 수준이다. 서로의 행동을 따라 하며 조롱하기도 하고 '밥맛'이라고 부른다. 스치기라도 하면 그 부분을 손으로 툭툭 털기도 한다.
매번 날이 서있는 엘파바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평소 글린다의 성격을 보면 단순히 엘파바가 초록 피부를 가졌다고 해서 놀릴 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What is this feeling (이 낯선 느낌, a.k.a 밥맛송)> 넘버에서도 엘파바와 함께 방을 쓰는 글린다를 위하는 친구들의 노래처럼 ('글린다는 정말 천사야, 나라면 절대 참을 수 없어.') 글린다는 천사 그 자체인데 말이다.
사실 둘이 그렇게 으르렁대는 데는 서로의 성격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가장 아픈 구석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글린다는 마법이 꿈 그 자체다. 대학교에서도 마법을 전공하고 싶어 하고, 입학 전 마법봉에 관한 에세이를 쓸 만큼 꿈에 열정적이다. 하지만 학교에 입학한 첫날부터 마법 수업을 주관하는 모리블 학장님께 거절을 당한다. 항상 주목받고 인정받았던 글린다인데 난생처음 받아보는 찬밥 신세에 당황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생전 처음 보는, 초록 피부를 가진 애가 나타나 자신은 절대 할 수 없을 마법을 부리더니 학장님의 마법 특별반에 초대된다. 자신이 그렇게 원했었던 그 특별반을.
엘파바는 선뜻 친해지기 어려운 성격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건 원인이 있다. 동생 네사가 다리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유를 자꾸 자신에게 찾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얽매여 살고 있는 엘파바는 자꾸 자신의 생(生)을 부정하는 지점까지 다다른다. 엘파바의 머리에서 늘 떠나지 않는 생각은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 가족은 행복했을 텐데'다. 그렇기 때문에 늘 가족 안에서 죄인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다. 심지어는 모리블 학장님에게 인정을 받은 후 혹시나 펼쳐질 희망찬 미래를 노래하는 넘버 <The Wizard and I(마법사와 나)>에서도 이 모습을 볼 수 있다. 'No father is not proud of you, No sister acts ashamed(번안 :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 자랑스러운 언니)' 늘 엘파바는 자랑스럽지 않은 딸, 부끄러운 언니였다.
사람들에게 예민하고 괴팍하게 행동하는 엘파바지만 사실 다른 사람들처럼 사랑받으며 평범하게 살고 싶은 속내가 있다. 마치 모두가 따르는 글린다처럼.
칙칙하고 어둡던 너의 과거를 다 잊게 만들어줄게 - <Popular>
엘파바와 글린다의 관계에서 특히 좋아하는 성장하는 지점들이 있는데, 특히 서로의 트리거였던 부분들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켜 주는 점이 그 지점 중 하나다. 처음으로 서로의 손을 맞잡고 친구가 된 파티 후, 돌아온 기숙사에서 둘은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때, 엘파바는 가족과 관련한 이야기를 꺼낸다. 어머니가 자신을 낳고, 다시 임신을 하자 또 초록색 아이를 가질까 두려워 매일 우유 꽃을 씹게 했다고. 그리고 동생 네사는 예정보다 일찍 태어났지만 다리가 불편한 채로 태어났고, 어머니는 그때 돌아가셨다고. 자신만 아니면, 자신이 초록색 피부로 태어나지만 않았더라면 어머니도 네사도 아버지도 모두 행복했을 거라고. 하지만 글린다가 이렇게 말한다.
엘피, 그건 비밀일 수는 있어. 하지만 진실은 아니야.
어쩌면 지금까지 엘파바가 가장 듣고 싶었을 말을 전해주며, 엘파바가 오랜 시간 갇혀 있었던 그 어두운 지하실로 손을 뻗어 꺼내 준다. 글린다는 엘파바에게 내려앉은 검은 먼지를 툭툭 털어버리며 진실과 비밀을 구별할 수 있도록, 다시는 자신의 생에 대한 부정을 하지 않도록 힘을 준다. 엘파바는 드디어 자신의 족쇄를 풀고 손을 맞잡은 채 세상으로 걸어 나온다.
나 닿을 수 없는 곳에 닿을 수 있는 너, 글린다
1막 끝에서 경비병을 피해 다락방으로 숨어든 엘파바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마법으로부터 찾는데 이때 글린다는 저지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래 네 날개는 어딨니? 엘피,
넌 어쩌면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능력이 없을 수도 있어.
물론 글린다는 오즈의 마법사와 모리블 학장이 너무 무서워서, 혹은 마법사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명예가 더 중요해서 엘파바를 종용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엘파바를 향한 말이 아닌, 글린다 자신에게 수없이 되뇌었던 말일지도 모른다. 글린다는 엘파바보다 더 현실적인 사람에 가깝기 때문이다. 처음에 봤을 때는 마냥 밝아만 보였던 글린다가 이렇게 변한 데는 이유가 있다.
글린다에게 엘파바는 언제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원하는 마법 수업에 초대받고, 마법 능력도 타고났고, 오즈의 마법사님도, 모리블 학장님도 모두 엘파바의 능력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엘파바와 함께 있으면 들러리에 가까웠다. 게다가 평생 그렸던 내 꿈을, 내가 아닌 친한 친구가 이루고 있는 걸 웃으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글린다는 점차 한계에 부딪히고 꺾이는데 익숙해져 갔다. 간신히 자리를 얻어낸 모리블 학장의 마법 수업에서도, 파티 드레스 하나 마법으로 나타나게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도 지쳐갔다. 그런데 글린다의 생각과는 달리 엘파바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잘 해낸다. 그리고 멀리 자유롭게 날아간다. 하지만 글린다는 그럴 수 없었다. 훨훨 날아가는 엘파바를 그저 먼발치서 응원할 수 밖엔.
그러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 자신이 오즈의 대표자가 되고, 사람들은 자신을 '선한 마녀 글린다'라고 부른다. 글린다도 알고 있다. 자신의 능력이 아주 부족하다는 걸. 게다가 세상 사람들은 자꾸 엘파바를 나쁜 사람이라고 몰아가지만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다. 앞에 나서서 그저 예쁘게 웃으며 표정을 삼키고, 손을 흔드는 게 전부다. 심지어 오랜만에 다시 만난 글린다와 엘파바의 우정에는 금이 가고, 연인조차 자신의 곁을 떠나버린다. 글린다에게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여전히 닿지 못할 꿈과 과장된 현실의 괴리 속에 남은 나날을 살아가는 것뿐.
그때 엘파바가 다시 나타난다. 글린다에게 서쪽 마녀를 물리친 선한 마녀라는 진정한 타이틀을 쥐어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글린다에게 그리머리*를 건넨다. 글린다는 읽지도 못하고 능력도 없다며 거절하지만 엘파바는 글린다를 돌려세운다. 너도 할 수 있다고, 읽지 못하면 그냥 읽는 법을 배우면 된다며 용기를 준다. 타고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다독인다. 글린다는 그 순간 드디어 자신을 평생 얽매어왔던 생각들로부터 벗어난다. 그리고 엘파바의 이 말은, 글린다가 평생 바라 왔던 말이다.
*그리머리 :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마법전. 세상의 모든 마법을 이룰 수 있는 책이다. 고대 문자로 쓰여 있어 해독이 어렵다.
너를 만났기 때문에(Because I knew you)
뮤지컬 <위키드>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넘버 중 하나인 <Defying Gravity(중력을 벗어나)>는 엘파바의 솔로 곡으로, 엘파바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듯 보이지만 개인적으로는 <For Good(너로 인하여)> 넘버에 버금가게 둘의 관계성을 잘 보여주는 넘버라고 생각한다. 엘파바와 글린다는 단순히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각자의 한계를 깰 수 있도록 도와줌과 동시에 서로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고, 그 한계까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원제의 'Defying'은 중력에 저항한다는 뜻도 있지만 중력(한계)을 잘 버텨낸다는 의미도 있다)
1막 끝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함께 가자"라고 말하는 엘파바의 말에 글린다는 선뜻 손을 잡는다. 함께 만들어 나갈 세상을 기쁘게 상상하지만 이내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음을(뛰어나지 않음을) 깨닫고, 대신 먼 길을 떠날 엘파바에게 망토를 둘러준다. 그리고 오즈에 남아 오즈민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착한 글린다'는 차츰 '선한 글린다'로 거듭나게 된다. 1막에서는 자신이 착하기 때문에 좋은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글린다지만, 2막에서는 본질적인 의를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신의 능력과 미래에 대해 자신 있던 엘파바도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받아들인다. 극 내내 엘파바가 말하던 'unlimited'는 2막에 다다라 'I'm limited'로 변화한다. 엘파바는 '나 닿을 수 없는 곳에 닿을 수 있는 너, 글린다'라고 말하며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보다 글린다가 가능한 일이 더 많다는 것을 수용한다. 그리고 더 좋은 세상을 위해 글린다에게 바통을 넘겨준다.
한계를 받아들인다는 건, 사실 더 큰 의미의 성장이기도 하다. 또한 혼자서는 이룩할 수 없고, 글린다와 엘파바처럼 오직 관계를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는 성장이다. 관계는 언제나 항상 복합적인데, <위키드>가 좋은 또 하나의 이유는 볼 때마다 이런 복합적인 겹겹의 감정이 새롭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캐릭터와 서사가 다층적인 레이어로 쌓여있어, 대사 한 마디 혹은 가사 한 줄에 느껴지는 감정이 여러 갈래로 풍성하다. 그렇기에 '그래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식의 단순한 결말로 끝나지 않았을 테다.
가장 마지막 넘버, <For Good(너로 인하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좋아하는 넘버이기도 한 이 곡이 둘의 관계를 완벽하게 설명해주는 곡이라고 생각한다. 가사와 함께 보면 더욱 좋아 이 가사를 마지막으로 글을 마친다.
<For Good(너로 인하여)> 가사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는 거라
사람들은 운명을 찾아내어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겨서
힘을 준대 성장할 수 있도록
어제와 다른 나의 인생은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널 만났기에
태양에게 이끌리는 작은 혜성처럼
바위를 만나 휘도는 시냇물처럼
너라는 중력이 손을 내밀어
난 너로 인하여 달라졌어 내가
우리 다시 만날 수 없다 하여도
너는 이미 심장의 일부가 되어
나 숨 쉬는 매 순간 항상 곁에서
힘을 내라 미소 지어 줄 테지
내일을 알 수 없는 내 삶이
너의 존재로 이렇게 따스해졌어
머나먼 바다로 떠날 항구의 배처럼
바람에 실려 날아갈 씨앗들처럼
이제는 내일로 나아갈 시간
난 너로 인하여
너로 인하여 달라졌어 내가
돌이켜보자면 철없던 내가 너를 상처 주기도 했지
나도 너무 어렸던 것 같아
자 웃으며 안아 주자 너와 나
태양에게 이끌리는 작은 혜성처럼
머나먼 바다로 떠날 항구의 배처럼
바위를 만나 휘도는 시냇물처럼
바람에 실린 씨앗들처럼
이제는 내일로 나아갈 시간
항상 너의 곁에서 널 지켜줄게
난 너로 인하여
너로 인하여
너로 인하여
달라졌어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