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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Dec 09. 2021

태도가 작품이 될 때

Oneself│박보나, <태도가 작품이 될 때>


 혹시 '북두팔성'이란 미술 작품을 들어본 적 있으실까요? 이는 미술가 박이소의 한 작품명인데요. 소개를 드리자면 간단합니다. 그저 북두칠성 옆에 별 하나를 더 그려낸 거지요.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냐면, 소외시키지 않겠단 건데요. 주류에 들지 못했다 해서 외면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칠성에 들지 못했다 해서, 다른 수천억 별들이 찬란히 빛나지 않는 건 아니지 않냐’는 따끔한 물음이면서 또 따뜻한 시선인 거지요.

 작가가 북두칠성 곁에 별 하나를 더 그림으로 인해 그 여덟 개의 별들은 아주 특별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기존의 질서가 별안간 무너지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게 된 거예요. 시선의 각도를 아주 살짝 틀었을 뿐인데 말이죠.     


 예술가 박보나의 에세이 <태도가 작품이 될 때>에는 박이소님과 더불어 여러 미술가가 소개되는데요.

그만의 색이 아주 짙은 작가들의 다채로운 예술관들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그들 모두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공통된 정서가 있는데요. 바로 그들의 작품들이 모두 ‘세상을 비껴보는 태도’에서 태생되었단 점입니다. 책의 겉표지에 인쇄된 서문 중 일부를 한 번 옮겨 볼게요.     


‘이 책에 나오는 작가들은 익숙하고 편안한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작업 을 시작한다. 작업을 통해, 일반적이고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모든 것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질문을 던진다. (중략) 그렇게 세상을 비껴보는 태도가 이 작가들 작품의 큰 중심이다. 태도가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구성한다.'  


 익숙한 것을 비껴보고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 굉장히 멋지다 느껴졌어요. 일순간에 차오른 호기심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고, 그 낯선 시선들에 흠뻑 빠졌다 나왔습니다. 저자의 친절한 해석에 기대어 다양한 작품들을 접하고, 또 그를 거울삼아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던 짜릿한 경험이었습니다.     


 책 속의 미술가들은 작품을 통해서 체계화되어버린 사회구조, 사회권위. 당연시된 성공 의지에 대해 따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반면에 차별과 소외를 당하는 비주류의 것들. 예속된 것 이외의 것을 욕망하는 자유의지 등을 감싸 앉아주지요. 그렇게 그들의 새로운 의식을 토대로 작품이 설계되고 창조됩니다.





#2

 앞서 이야기했던 ‘북두팔성’도 그렇게 탄생한 셈이죠. 여기서 드러난 그의 작품관을 토대로 박이소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중심보다는 주변에 시선을 두는데요. 모두가 주목하고 또 자신 또한 편승하길 원하는 특정 지점에서 각도를 살짝 튼 주변을 조명하는 거지요. 그런 채로 아주 오래 머물러주어요. 그리고 아주 열렬히 응원해 줍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에요.  ‘박이소가 바라보는 곳은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부로 밀려나고 소외된 세상이다. (중략) 작고 사소한 존재들에 대한 박이소의 관심은 다정한 배려와 애정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작가는 이 작고 연약한 것들이 전체를 울리는 순간을 기다린다. 먹으로 풀을 그리고 ‘그냥 풀’이라고 쓴 작업에서는 한낱 풀이 주인공이 된다. <잡초도 자란다>에서는 잡초가 거센 바람을 견디고 크게 자라기 바라는 작가의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이들이 자라서 중심의 질서를 흔들기 원하는 작가의 기대가 담겨 있다.’


 또 다른 작품에선 조금이라도 움츠러들었을 존재들의 미래를 밝혀주기도 합니다. ‘박이소는 2001년 대안공간 풀에서 열렸던 공사장에서나 쓰는 투박한 실외 조명기들을 각목에 얼기설기 덧대어 전시장 한쪽 구석을 눈부시게 비추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 작품의 제목을 확인하던 순간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전시장 한 켠에 작게 쓰여 있던 제목은 자그마치 ’당신의 밝은 미래‘였다. 연약한 시각적 구성으로 표현된, 허름하고, 흔하여, 낮고, 구석진 곳들에 대한 작가의 배려가 고맙고 울컥했다, (중략) 박이소는 강하고 크며, 화려한 중심이 아닌, 연약하고 작으며, 소소한 주변으로서의 우리를 노래한다. 그리고 그 주변이 스스로의 언어로 나름의 질서를 만들 수 있다고 속삭이는 듯하다. 따뜻하고, 정직하고, 다정하게 살면 된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이렇게 따스할 수가요. 세상이 집중 조명하는 정중앙이 아닌, 그렇지 못한 주변 곳곳을 샅샅이 살펴준다니, 그로 인한 포만감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저자의 어깨너머로 그의 작품들을 접하다 보면 미묘한 감정들이 몽글몽글 차오르더군요. 늘 멀게만 느껴지는 목표지점, 그 언저리에라도 닿고 싶어 필사적으로 애쓰는 제가 연상되었던 탓이었어요. 멈추지 않고 아등바등하는 것이 당연히 고마웠지만, 한편으로 안쓰럽기도 했고, 조금 우스워 보이기도 했는데요. 작가가 주변을 조명하는 것만큼도, 현재 지점의 저를 살펴주지 못했단 생각에 낯이 뜨거워졌습니다. 목표지점만 뚫어져라 응시하느라 주변은 전혀 살피지 못한다는 것도 어쩐지 부끄러워졌고요.     


 그의 작품들을 접하며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닿고자 하는 지점과 나를 잇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나와 나를 잇는 일임을요. 쫓고자 하는 것에 도취되어 첫발을 디뎠을 때의 순수한 의도를 잃지 않아야 함을요. 또한 중심의 위계에 주눅 들지 않을 것, 그리고 그쪽으로만 편중된 시선을 두지 않을 것도요.  

   

 모두의 관심이 쏠리는 한 지점만을 조명하기에 세상은 넓고, 우리의 삶도 깁니다. 목표지점이 어디에 있든 중심축이 되어야 하는 건, 우리 각자가 서 있는 지점이어야겠지요. 우리는 더욱 도약하기를 꿈꾸며 오늘도 발을 구르지만, 당장의 위치를 경시할 일은 아닙니다. 저마다의 걸음새와 그 박자가 다를 뿐입니다.

 빛을 보게 될 순서가 중요한가요? 지금 열렬히 반짝이고 있단 사실이, 그리고 앞으로 더 빛나게 되리란 희망이 전부일 테죠. 그것이 우리를 멈추지 않고 움직이게 합니다.      





#3

그나저나 ‘예술’ 말이에요. 이렇게나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었네요.

예술이 고귀하고 멋진 것이라고만 여겨왔지 왜 그런지에 대해선 골똘히 탐색해보지 못했는데요.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보듬어주기 때문이었네요.

그 이색적인 발상의 출발점들은 하나같이 삶을 지탱하는 우리들에 대한 애착 어린 관심이었던 겁니다.

거기에 남다른 통찰력이 더해져 새로운 지평이 펼쳐졌던 거였어요.     


 이와 같은 미술가들의 노력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적었는데요. ‘익숙한 것이 살짝 어긋나는 지점에서 생기는 두려움은 흥미로운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정말 그렇더라고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곳을 주목하자 ‘북두팔성’ 속 여덟 번째 별이 발견되었던 걸 보면 말이죠.

관성을 따르지 않고 낯선 곳을 응시하는 것. 그늘진 곳을 살피는 것. 길은 그렇게 만들어지기도 하더군요. 이러한 힘이 예술의 필요를 입증해주는 게 아닐까요?      


 낯설게 보고 의심을 던지는 창작자의 노력 말이에요, 예술이 위대하고 신성하다 여겨지는 여러 이유 중 큰 몫을 차지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따뜻한 시선 덕에 우리는 위안을 얻고, 다시 삶에 기대를 걸고, 성장을 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삐딱한 시선이 더욱 인간적이라 여겨집니다.

때때로 삐딱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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