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인생의 페달을 뒤로 돌리는 용기도 필요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사용하던 암호 체계 '에니그마'의 해독을 둘러싼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을 본 사람이라면, 바보스러울 정도로 억척스럽게 암호 해독에 도전하던 천재 과학자 앨런 튜링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제 인물 앨런 튜링이 아닌 그의 역할을 맡았던 개성 강한 배우 베네틱트 컴버배치를 앨런 튜링으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앨런 튜링은 '컴퓨터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가 컴퓨터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는 인류가 컴퓨터를 발명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912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수학자이자 암호학자였으며 최초의 컴퓨터 과학자로 불린다. 앨런 튜링은 최초로 단순한 형태의 컴퓨터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였으며, 알고리즘을 통한 계산 기계 '튜링 기계'를 제시함은 물론 역사적으로 잊힌 최초의 컴퓨터 '콜로서스(colossus)도 만들었다. 다만 영국 정부가 그 존재를 비밀에 부치는 바람에 역사상 최초의 컴퓨터 타이틀을 '에니악'에게 내주게 된 점은 개인적으로도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수학 문제를 푸는 특출한 재능은 있었지만 튜닝은 늘 부족한 학생이었다. 필체는 엉망이었으며 단순한 계산 문제는 틀리기 일쑤였다. 말도 더듬었다. 인도에서 근무하는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하는 평탄하지 않던 삶을 살던 그가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부모의 귀국으로 온전한 가정의 테두리 안에서 생활하게 된 18세 때부터이다. 케임브리지 대학 킹스칼리지에 입학하면서부터 그의 천재성은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수학적 천재성과 튜닝 기계를 활용하여 독일의 암호 체계 '에니그마'를 해독하게 되는데, 그 과정을 영화화한 것이 바로 '이미테이션 게임'이다. 그야말로 수학으로 나라를 구한 것이다. 그러나 튜링의 삶은 화려하거나 영광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는 비운의 과학자라는 수식이 늘 따라다닌다.
그의 천재성과 과학적 업적은 전시 '국가 기밀'이라는 장막에 가려 대중에게 감춰졌고, 당시에는 불법으로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되었던 동성애가 발각되어 화학적 거세를 당하게 된다. 그리고 2년 뒤 극소량만을 섭취해도 사망에 이르는 시안화칼륨을 넣은 사과를 먹고 그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닐 때 알려진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꽃가루 알레르기를 심하게 앓아서 해마다 꽃이 피는 봄이 되면 꽃가루를 막기 위해 방독면을 쓴 채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자전거가 너무 낡은 까닭에 체인이 자주 빠졌다. 그런데 천재 앨런 튜링은 자전거 타는 방법도 남달랐다. 튜링은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페달을 몇 바퀴 돌리면 체인이 빠지는지 관찰했다. 그리고 관찰 결과를 바탕으로 체인이 빠지려는 순간을 미리 알아내 페달을 뒤로 한 바퀴 돌린 후 다시 앞으로 페달을 밟았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는 자전거 체인이 빠지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아마도 어린 시절 시골에서 낡은 자전거를 타본 사람이라면 그 장면을 생생하게 재생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물론이고.
우리 인생도 가끔 페달을 뒤로 밟아야 할 때가 있을지 모르겠다.
앞으로만 돌아갈 줄 알았던 인생의 체인이 고장 났을 때, 기어이 앞으로 가려고 발버둥 치기보다는 지혜롭게 가끔씩 페달을 뒤로 돌려 보면 어떨까?
오늘따라 꽃가루 날리는 봄날, 낡은 자전거 페달을 뒤로 돌리는 앨런 튜링이 떠오른다.
- 튜링의 업적과 삶의 고통에 지지를 보내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