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좋아하는 무엇인가를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음악, 심지어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좋아하는 속옷 브랜드까지. 어쩌면 지구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하찮은 돌멩이 하나까지도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하물며 사람은 더 말해 무엇할까. '짚신도 짝이 있다.'는 오래전 조상들의 지혜를 굳이 불러내지 않더라도 말이다.
시인이나 철학자에게 묻지 않더라도 무엇인가를 좋아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향긋한 아침 커피 한잔은 단순한커피 한잔이 아닌 마음의 위안이자 하루의 행복이며 맑은 정신의 샘물이다. 어떤 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행복한가. 좋아하는 사람끼리 주고받는 온화한 미소는 보는 사람에게도 전염되어 가슴 설레게 한다. 이렇듯 사람은 좋아하는 대상을 마주할 때 안락함과 편안함과 마음의 위안을 얻고 행복해진다. 사랑하는 내 가족을 만날 때, 좋아하는 음식을 눈 앞에 두었을 때, 좋아하는 반려 동물이 나를 반길 때도 우리는 행복감을 얻는다.
나는 선재길이 참 좋다. 온 나라가 걷기여행 열풍에 휩싸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오늘날, TV마다 걸어서 세계를 여행하라며배낭은 시간 날 때 싸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싸야 하는 거라고 속삭인다. 항공권은 또 어떤가? 지금 당장 표를 끊어야 그 물결에 동참하는 쿨한 사람이라며 발권을 부추긴다. 지리산 둘레길과 제주도 올래길이 텔레비전 여행 프로그램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바야흐로 진정한 걷기 여행자라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남미 파타고니아 정도를 걸어야 하는 것처럼 호들갑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선재길이 좋다. 수수하고 촌스럽지만 언제나 가까이서 편안하게 나를 반겨주는 선재길이 참 좋다.
선재길은 우리 인생을 닮았다.
짐작조차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두껍게 얼어붙은 선재길의 봄은 결코 따뜻한 바람과 함께 오지 않는다. 차디찬 겨울을 버티며 이겨낸 버들강아지의 가녀린 생명이 봄을 속삭이면, 그제야 살찐 얼음도 제 살을 녹여 '졸졸졸' 맑고 투명한 목소리로 화답한다. 조심조심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고, 세심한 눈길이 아니면 보이지 않을 숨죽인 봄이다. 인고의 세월을 말없이 이겨내신 어머니와 닮았고, 청아한 울음소리 토하며 세상에 나온 우리의 삶과 닮았다. 그래서 선재길의 봄은 우리의 유년기다.
선재길과 함께 흐르는 오대천 겨울 계곡
선재길의 여름은 짙고 상쾌하다. 오대천 계곡은 구불구불 선재길과 함께 여름을 짓는다. 맑은 계곡물은 풀과 나무를 짙게 물들이고 상쾌한 바람은 여름의 향기를 덧씌운다. 코끝을 간질이는 풀내음과 물소리, 바람과 어우러진 새들의 노래 가득한 여름 선재길은 생명의 아우성이다. 여름 선재길을 걸어 본 사람은 감히 겨울 선재길의 쓸쓸함을 상상하지 못한다. 푸르른 청춘이 그 시들음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래서 선재길의 여름은 우리 인생의 청춘기를 닮았다.
여름 선재길에서 만나는 야생화
가을 선재길은 화려하다. 편도 9km를 걷는 내내 자신의 화려한 가을 옷을 자랑한다. 선재길 단풍이 유난히 아름다운 것은 물가에 심어진 단풍나무가 많은 탓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단풍잎이 붉게 물드는 것은 추위에 대항하는 나무의 자기 보호 활동이다. 기온이 낮아지고 일교차가 심해지는 가을이 되면 나무는 스스로 붉은색 옷을 입고 광합성을 멈춘다. 물가에서 자라는 수분이 충분한 단풍잎의 붉은빛은 더 또렷하고 찬란하다.
흔히 사람의 일생에서 중년이 가장 화려하다고 한다. 어느 정도 사회적인 기반을 갖춘 연령대라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일 게다. 그러나 중년의 화려함 뒤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에 대하여도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인생의 중후반기에 드러나는 삶의 위태로움을 화려함으로 위장한다고 하면 과장일까? 다가올 노년기를 끝내 외면하고 싶은 인간적인 몸부림 말이다. 가을 선재길의 화려함은 우리 인생의 중년기를 닮았다.
선재길의 가을 단풍
겨울 선재길은 시리지만 눈부시고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다. 겨울이 되면 선재길은 차갑게 얼어붙는다. 오대천 맑은 물도 얼음 속으로 몸을 감추고 푸르던 단풍잎은 온데간데없다. 길도 나무도 한결같이 차고 시리다. 그러나 하얀 눈옷으로 갈아입은 선재길은 눈부시다. 차가운 동토는 차라리포근하게 느껴지고, 그 비단결에 발자국을 남기며 걷는 사람은 황홀하다. 혼자 걷기 미안한 길, 겨울 눈 덮인 선재길이다.
흔히 고독은 스스로 선택한 외로움으로 불린다. 그래서 외로움은 괴롭지만 고독은 괴롭지 않다. 스스로 즐기는 고독은 내면을 성장시키는 양분이다. 겨울 선재길은 외롭지 않다. 찬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 말을 걸어온다. 찾는 이가 별로 없기에 길도 나도 고독의 즐거움을 나눈다. 그래서 선재길은 우리 인생의 황혼기와 닮았다.
겨울 눈내린 선재길은 더없이 포근하다.<좌> 거제수나무와 파란 하늘 <우>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이 그대에게 있다면, 그 목록에 '좋아하는 길' 하나쯤을 더 담아 보자.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찾을 수 있는 곳, 계절을 가리지 않고도 나를 맞아 줄 수 있는 길이면 더욱 좋겠다. 새로운 길을 찾는 도전도 중요하지만, 익숙하게 알고 있는 길로 되돌아갈 줄 아는 지혜도 필요하다. 우리 삶의 위기의 순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