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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물점 Jan 22. 2020

오래 전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

겨울 선재길에서 2화 <인연>

인연


내가 처음 선재길을 만난 것은 대략 40년 전, 1979년 여름 무렵이다. 아마도 초등학교 5학년 때였을 것이다.생각해 보면 선재길을 만났다기보다는 오대산을 만났다고 해야 더 정확하겠다. 당시 나는 오대산 월정사 정도만 알았고 선재길은 듣지도 알지도 못했으니까.

메밀꽃 필 무렵으로 잘 알려진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에서 태어난 나는 지리적으로 오대산과 가까이 살았다. 그러나 당시는 교통편이 없어 먼 곳과의 왕래가 드물었던 시절이었다. 내 어머니도 몇 시간을 걸어서 대화장에 다니셨고, 결혼 전 아버지는 왕복 6시간을 걸어 대화에 있는 중학교를 다니셨다. 어디 그뿐인가. 내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은 기껏 옆 마을이나 멀어야 이웃하는 면 정도에서 처녀나 총각을 찾아 결혼하던 시절이었다.


'반공 소년 이승복, 그리고 나'

그런 내가 오대산에 갈 기회를 얻은 것은 순전한 행운이었다. 지금 젊은 세대들은 잘 모르겠지만, 소위 반공 소년으로 널리 알려진 이가 있었다. 바로 '이승복'이다. 이승복은 1968년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에 의해 그의 일가족이 살해되는 과정에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고 알려졌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탓에 '이승복 어린이'로 더 잘 유명했고, 특히 공산당이 싫다는 그의 말에 근거하여 '반공 소년 이승복'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각 학교마다 그의 동상이 세워졌고, 그를 기리기 위한 각종 반공 관련 대회가 연중 학교 행사로 자리 잡았다. 아직도 그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강원도 평창군 속사면에는 이승복 기념관이 있고, 계방산 아래에는 그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이승복 생가


당시는 남북이 극한으로 대치하는 상황이었고, 그 대결의 한 복판에 위치하였던 강원도 평창은 가히 반공 운동의 핵심 지역으로 불릴 만큼 격렬한 반공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은 '이승복 조작설' 등으로 당시의 기억들이 많이 지워졌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는 '반공'이라는 말을 '공부'라는 말보다 더 많이 들으며 학교를 다녀야 했던 시절이었다. 이승복과 관련된 사건이 발생하고 10년이 채 지나지 않았던 점도 그 배경으로 작용했을 테지만 소위 반공 이데올로기를 악용하여 정치적 이익을 챙기려는 세력의 마녀사냥식 반공 몰이가 더 큰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학교 운동회는 늘 온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는 김일성 화형식과 반공 결의대회로 마무리되었다. 어린 나에게 김일성은 늘 짚으로 만들어진 인형으로 기억된다. 헝겊으로 두른 옷에 불이 붙은 채로.  


당시 나는 대화면에 있는 안미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초등학교 다니던 내내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말 대신 '단결'이라는 인사말을 사용했다. 선생님들께 인사를 할 때마다 '단결'이라고 크게 외쳤다. 어린 나는 '단결[당결]'이 무슨 뜻인지 늘 궁금했다. 아무도 그 뜻을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선생님께 드리는 인사말이 '단결'이라니. 차라리 '저축'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내가 오대산에 가게 된 것도 학생들이 참여하는 반공 활동 덕분이다. 학교마다 5학년 학생들 중 몇몇을 뽑아 오대산 근처에서 야영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엉겁결에 그 행사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오대산을 만났다. 어린 마음에 낯선 곳에서 담요를 깔고 잠을 잔다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선생님의 명령?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처음 만난 오대산은 나에게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맑은 물과 수려한 산은 우리 동네에도 충분히 많았으니까. 다만, 월정사라는 절은 무척 좋아 보였다. 시골 촌에서 볼 수 없는 기와집 지붕이 왜 그렇게 높아 보였는지....... 63 빌딩을 처음 보고 탄성을 지르던 시골 어른들의 그 감동과 아마도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2020년 1월.

스무 번째로 찾은 오대산 입구에는 여전히 청소년 수련원 간판이 수려한 소나무 숲 사이에 든든하게 서 있다.

'아직도 수련활동을 하고 있을까?'

소소한 궁금증과 함께 내 기억은 40년 전 어느 날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분산돼 있는 지난날을 스스로 끌어 모으면 내 정체성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썼다. 2020년 1월 선재길에서, 나는 잊고 지냈던 40면 전의 나를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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