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졸업까지 1년, 남은 시간 동안 여기에 더 깊숙이 뿌리를 내리자고 마음먹으며. 온종일 방에 박혀 있다가 해가 지면 맥주를 꺼내 하루를 마무리하는 걸 좋아하지만, 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부지런히 일어나 아침부터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다. 갈 빛이던 겨울 산에 찾아온 연두색과 분홍색 정령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봄의 해는 포근하고 따듯해서, 볕을 쬐며 걷고 있으면 부드러운 이불에 들어간 것 처럼 아늑한 기분이 든다. 벚꽃이 한창 학교를 뒤덮듯이 피어나는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분주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우선 개구리 얼굴이 그려진 2단 도시락통을 꺼냈다. 사 년 전 좋아하던 후배가 있었는데, 학교에 가서 함께 벚꽃을 구경하기로 약속한 날 할인 마트에서 샀던 것이다.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공들여 싼 도시락을 준비해갔던 기억이 난다. 낑낑대며 커다란 돗자리도 챙겨갔었다. 벚꽃은 금세 저물었고 그 후배를 위해 다시 도시락을 쌌던 적은 없다. 하지만 사 년 내내 오로지 나를 위해, 때로는 아끼는 친구를 위해 이 도시락통을 잘 사용했다. 등산이나 나들이를 하러 갈 때마다 맛있는 것들을 가득 챙겨갔다. 날이 좋을 때 열심히 싼 도시락을 먹고 있으면 온몸에 행복의 기운이 차올랐다.
도시락에 뭘 넣을지 생각하다가 1단에는 흰 쌀밥, 2단에는 친구가 챙겨준 냉동 떡갈비를 담기로 했다. 떡갈비를 바싹 구워서 아삭한 양배추 위에 올리고 따뜻한 밥도 꾹꾹 눌러 퍼담았다. 다 싼 도시락과 커피를 등산 가방에 넣고 샛노란 잠바를 꺼내 입었다. 집을 나서려는데, 전 날 냉동실에 살짝 얼려둔 소주가 생각났다. 소주병을 가방 옆구리에 찔러넣고 쿠바에서 사 온 조그만 칸찬차라 잔을 손수건에 칭칭 감아 넣었다.
이 나들이는 학교 뒷산에서 시작됐다. 30분 부지런히 걸어 언덕을 넘어가면 넓은 호수가 나온다. 호수를 보러 가기 까지의 과정이 무척 즐거웠다. 등산 초입부터 꽃이 만발하게 핀 벚나무가 반겨주고 있었다. 부드러운 흙길을 꾹꾹 밟으며 연한 풀색으로 물들고 있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호수가 보였다. 호숫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수면 위로 유리알 같은 햇빛이 굴러다니는 걸 지켜봤다. 커피를 몇 모금 마신 후 다시 여정을 시작했다. 숲길을 조금 걸어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온통 분홍빛으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소풍을 온 듯한 젊은 부부, 교복을 입고 서로 열심히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 학생들이 보였다. 언덕을 조금 올라 돌로 만든 넓은 야외극장 근처에서 밥을 먹을까 하다가 괜찮은 장소가 떠올라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바로 학교 전경이 내다보이는 동아리 건물 옥상이다. 테라스 끄트머리에 작은 정사각형 미니 테라스가 있는데, 환풍구를 밟고 올라가 아슬아슬한 난간 위를 기어가야만 다다를 수 있다.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광장을 잔뜩 메운 벚나무 군락이 한눈에 담긴다.
가방을 깔고 앉은 다음 가져온 것들을 난간 위에 펼쳐놓기 시작했다. 먼저 손수건을 잘 깔아놓고 소주병과 잔을 올렸다. 아직 차가운 소주병에 하얀 서리가 끼어있었다. 도시락통에 눌려있던 떡갈비와 밥에게도 숨통을 트여주었다. 작은 등산을 하고 왔으니 이것도 ‘하산 주'다 하며 소주 뚜껑을 땄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떨어진 벚꽃 잎이 보였다. 챙겨온 잔에 꽃잎을 넣고 소주를 따랐다. 적당히 선선한 날씨와 함께 하는 봄 술은 이루 말할 것 없이 낭만적이다. ‘춘주(春酒)’가 술 중에 술, 최상의 술이라는 어느 글이 떠올랐다. 소주를 한 모금 삼킨 후 짭조름한 떡갈비를 입에 넣었다. 은은한 숯불 향이 나면서 달짝지근한 간장소스의 맛이 일품이었다. 애정하는 도시락통에 담아 산을 넘고 호수를 지나온 떡갈비이니, 담양에서 먹는 맛 부럽지 않았다. 짠맛을 중화시키기 위해 쌀밥을 조금 떠서 같이 씹어본다. 역시 고기반찬에는 밥이라며 순식간에 식사를 마쳤다. 취기에 헤실헤실 웃고는 반 정도 줄어든 소주병 뚜껑을 닫고 다시 짐을 챙겼다.
이제 이 나들이를 마무리할 차례다. 시간은 오후 2시, 수업까지 한 시간 정도가 남은 때였다. 동아리 건물 바로 옆에 있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좀 읽기로 했다. 열람실은 학교 안 공간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지하에 있어 봄이나 여름에도 꽤 서늘한데, 넓은 아치형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받으며 책을 읽고 있으면 아늑한 느낌이 든다.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서 찾아야 하는 보존서고의 오래된 책들과 책장 사이에 비밀 공간 같은 자리 때문에 학교 도서관에 자주 갔다. 늘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는데, 지브리 애니메이션 주제가 클래식 버전을 틀어줄 때가 제일 좋았다. 이날은 가수 아이유의 히트곡 클래식 버전 메들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낮술을 걸친 참이니 아무 생각 없이 보기 괜찮은 그래픽 노블을 몇 권 읽기로 했다. 더 심슨, 마블 코믹스를 조금 보다가 수업을 들을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