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에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루벤의 할머니 댁인 따로우까에 가기로 했다. 작은 선물로 쿠키를 만들고 싶었다. 밀가루와 올리브유, 버터를 조금 넣어 반죽을 만들고 허브와 소금을 넣어 바질 쿠키를, 누텔라 잼을 넣어 초코 쿠키를 만들었다. 처음 하는 베이킹이 소꿉놀이하듯 재밌었다. 가위로 모양을 내서 트리, 눈사람, 지팡이, 별 모양 등을 만들었다. 모양을 잘 내보겠다고 온 손에 기름칠을 하고 한참을 만지작 거렸다. 부엌에서 나오지 않는 나를 이상하게 여긴 루벤과 파티마는 결국 내 깜짝 선물의 계획을 알아버렸다. 그렇게 모두의 도움 끝에 새벽 3시가 넘어 겨우 쿠키 만들기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파티마의 차에 올라탔다. 맑지만 조금 쌀쌀한 공기의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자동차 라디오에서는 캐롤 메들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포르투의 울퉁불퉁한 돌 도로가 끝나갈 때쯤 낯선 도시의 외곽 풍경이 나왔다. 포르투갈의 북쪽 마을을 향해 차는 끊임 없이 언덕길을 올라갔고 그림 같은 도우루강 협곡과 포도밭을 실컷 볼 수 있었다. 루벤은 여름에 보는 포도밭의 풍경은 더 멋지다며 내가 겨울에 온 것이 아쉽다 말했다. 작은 자동차는 웅장한 협곡 사이 몇 개의 다리를 거쳐 두어 시간 만에 도착했다. 따로우까 마을은 높다란 산 중턱에 있었다. 메아리 소리가 울려 퍼지는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루벤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조금 연습했던 포르투갈어로 수줍게 자기소개를 했다.
첫 식사는 돼지고기구이와 육즙을 얹어 먹는 할머니 표 스파게티 요리였다. 고기 기름이 입혀진 스파게티는 매끄럽고 짭짤했다. 여전히 칼과 포크를 다루기 어려워했으면서도 배가 고파 커다란 고기를 대충 썰어 허겁지겁 먹었다. 내가 머무를 방은 2층의 다락이었는데, 침대 위에 수많은 인형이 체스판에 있는 말들처럼 각을 맞춰 띄엄띄엄 올려져 있는 게 무척 귀여웠다. 작은 창에는 커다란 망원경도 있었다. 동네를 돌아보니 감나무와 시골 개들이 있는 풍경이 우리나라 시골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작은 산타 인형이나 크리스마스 장식이 대문과 창문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모습은 달랐다.
할머니의 집 1층엔 루벤의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카페가 있었다. 두꺼운 통유리벽으로 둘러싸인 아늑하고 정겨운 분위기였다. 따로우까가 인구 삼천 명의 자그마한 마을인 만큼 카페에 갈 때마다 또다시 동네 사람들에게 내 소개를 해야 했다. 아버지가 주시는 커피는 에스프레소 잔 크기의 컵에 담겨져 나왔는데 짙은 갈색 빛깔에 무척 뜨겁고, 달짝지근한 맛이었다. 카페 한쪽에서 절대 져주지 않는 루벤과 포켓볼을 치다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다.
크리스마스에는 대구요리를 먹는 게 포르투갈의 전통이라더니, 정말 엄청난 양의 대구찜이 나왔다. “대구의 무덤이다..”라고 중얼거릴 정도였다. 촉촉하고 야들한 살과 함께 삶은 배추, 밥을 먹었다. 따끈하고 담백한 음식이 시골 마을의 여느 인심처럼 다정하고 풍족하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 식사를 하면 남은 대구살은 으깨어 배추와 빵과 함께 한 솥에 끓인다. 매운맛이 전혀 없는데도 얼큰하고 개운하다. 식감은 씹지 않고 삼켜도 될 정도로 부드럽고, 맛은 구수함의 극치를 달린다. 한국의 추어탕이나 어죽이 생각나는 맛이었다. 루벤과 할아버지, 나는 배가 고픈 밤에 땀을 흘리며 이 대구빵죽 몇 그릇을 비워냈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다이닝 룸의 커다란 테이블이 가득 차도록 채워놓았던 음식들을 조금씩 덜어 먹는다. 각종 튀김을 점심 삼아 먹고 저녁에는 다시 배 터지는 만찬 시간을 가졌다. 어제의 대구요리를 담은 커다란 접시에 터키 고기 요리를 산처럼 담아낸다. 닭고기와 비슷한데 양은 어마어마하게 많고, 육즙이 입안에서 폭발할 정도로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이 터키 요리를 메인으로 함께 먹었던 통감자 구이도 맛이 좋았다. 포르투갈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자에 대한 자부심이 해산물만큼이나 강한데, 그럴 만도 한 게 작은 알의 감자가 참 쫀득하고 수분 충만한 맛이다.
기름진 입안을 개운하게 해주는 각종 샐러드도 맛있었지만 그린 올리브가 가장 특별했다. 올리브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쌉쌀한 맛과 상큼함이 느껴지는 풍미가 계속해서 손을 이끌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농사지은 올리브라고 하니 더 신선하고 맛있게 느껴졌다. 기존의 올리브 통조림과 다르게 짠맛은 강하지 않았고 알맹이도 더 단단한 식감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할아버지는 자랑스레 와인 두 병을 꺼내오셨다. 한 병은 가벼운 포도 맛, 한 병은 묵직한 토니 와인 맛이 났다. 이 와인 또한 직접 만들고 숙성시켰다 하셨는데 나는 특별함과 감사함에 몸 둘 바를 모르고 밤새도록 할아버지와 술을 나눠 마셨다. 며칠 전 구매한 조명이 달린 스웨터의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며 (심지어는 캐롤 노래도 나오는 스웨터였다) 보답이라도 되는 듯 잔뜩 재롱을 부렸다.
그날 저녁 파티마는 조용히 내게 와 정성스레 포장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내밀었다. P, O, R, T, O 철자가 대롱대롱 매달린 작은 열쇠고리와 마찬가지로 포르투라고 쓰여있는 맥주병 따개였다. 선명한 초록색의 크리스마스 포장지까지 파티마의 정성이 가득 느껴졌다. 챙겨온 다이어리 한쪽에 포장지를 잘 잘라 붙여놓고 스웨터에 불을 켜놓은 다음, 캐롤에 맞춰 땀이 날 때까지 춤을 춘 후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2편에서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