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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형 Dec 27. 2023

[2주간이주형]모더니즘 대완성: 잠실실내체육관(김수근)

2023 에스파 첫 콘서트: 'SYNK: HYPER LINE' 후기

잠실운동장 마스터플랜 당선작(1977), 출처: 손정목(1999), "서울도시계획이야기-잠실지구가 개발되기까지".

건축가 김수근(金壽根)은 1977년 잠실 마스터플랜 공모전에서 당선된다. 주경기장, 수영장, 실내체육관 등을 아우르는 초대형 스포츠 단지를 누가 설계할 것인지를 놓고 펼쳐진 설계경기였다. 훗날 서울올림픽이 펼쳐질 무대가 처음으로 위용을 드러낸 순간이기도 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참가자들에게 주어진 공모기간은 불과 2개월이었는데, 김수근은 2년 전부터 계획을 진행해오고 있던 것이다.


4년 전인 1973년 김수근은 서울시로부터 약 20,000석 규모의 실내체육관 설계를 의뢰받는다. 뒤이어 1975년에는 실내체육관뿐만 아니라 잠실 대운동장 전체의 계획을 극비리에 마련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계획이 일반에 공개되기 이전이었다. 청와대가 대운동장 조성 계획을 발표하고 비로소 공모가 열린 1977년, 김수근의 실내체육관은 이미 한창 공사 중이었다.

잠실 실내체육관 준공(1979.4), 출처: 서울사진아카이브

1979년 4월 실내체육관이 준공된다. 잠실 주경기장 일대에서 처음으로 완공된 시설이다. 허허벌판 위에 우주비행선이 착륙한 것만 같은 비현실적인 광경이다. 도로는 새로 닦은 듯 말끔하다. 왼쪽에 보이는 공사장에서는 주경기장이 막 첫 삽을 떴다. 오른쪽의 한강 너머로는 야트막한 들판이 펼쳐진다. 1979년 말에 이르러서야 정부는 올림픽 유치에 도전하기로 한다. 올림픽이 열릴 줄 모르고 지어진 올림픽 경기장이다.

그로부터 44년이 흘렀다. 올림픽을 겪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은 시대가 되었다. 주변에는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건너편 주경기장이 이목을 끌기에 이 건물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묘목에 불과하던 가로수들이 덩치 큰 나무가 되어 체육관을 에워싸기에 더더욱 그렇다. 콘크리트 덩어리는 세월의 무게를 뒤집어쓴 것인지 뿌연 베이지색이 되었다. 2010년에는 새로 도장이 이루어져 기둥이 오렌지색으로 변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시간이 흐르면서 건물이 더 좋아진 것처럼 보인다.

잠실 실내체육관 준공(1979.4), 출처: 서울사진아카이브

모더니즘 건축은 보행동선을 구분하는 것을 좋아한다. 누가 어디로 다닐지 미리 정하고 건물을 짓기 때문이다. 내 자리에 맞는 입구를 찾아서 들어가야 한다. 반면 요즘 경기장에서는 일단 아무데로나 들어가서 정해진 자리를 찾아간다. 준공 당시 사진을 보면 그 의도가 좀 더 잘 보인다. 전면에 위치한 계단이 큰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자리가 2층이면 주저 말고 계단을 올라오라!

2층에 위치한 광장은 넓고 광활해서 마치 새로운 광야에 도달한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잠실 실내체육관 준공(1979.4), 출처: 서울사진아카이브

넓지만 오래 머무르고 싶은 공간은 아니다. 넓은 광장은 오직 사람들이 드나들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여기에는 벤치도 가로수도 없다. 오직 입구와 출구 뿐이다.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다. 이렇게 모더니즘은 빈틈이 없다. 모든 것을 규정짓고 제어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다. 모더니즘 건축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나요? 하얀 건물이 덩그러니 놓여 있으면 모더니즘이다.

그런데 여기는 사실 잠실실내체육관이 아니다.

에스파의 '광야'다.

2023 aespa 1st concert - SYNK: HYPER LINE

에스파 콘서트 갔다!!! 사실 작년 여름에 팬미팅에 가려고 티켓팅까지 했었는데, 공연 직전에 코로나에 걸려버리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고 취소해야만 했다. 이번에는 건강관리를 잘 했기에 드디어 갈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나온 곡이 15곡인데 어떻게 콘서트를 할 수 있지? 궁금했는데 해결법은 간단했다. 수록곡 포함 모든 곡을 전부 다 하고, 신곡을 무려 10곡이나 들려줬다. 콘서트가 열리던 때는 SM 경영권 분쟁이 한창인 때였다. 컴백이 밀렸다는 사실을 방증하듯이, 새 앨범에 들어가는 노래를 타이틀곡만 빼고 다 들려줬다...! 그래서 새 앨범 쇼케이스와도 같았다.


티켓팅에 정말 간신히 성공했기에 3층에 앉았다. 팬클럽 선예매를 해야만 1,2층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무대가 가깝지는 않았지만, 공연장 전체가 한눈에 보여서 좋았다. 같이 간 형은 취미가 탐조였기에 아주 고성능의 쌍안경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무려 12배율 쌍안경을 빌려주었다.


"이거 근데 계속 보고 있으면 눈에 안 좋아."

"왜요?"

"레이저쇼 할 때 이걸로 보면 12배 밝게 보이거든."

2023 aespa 1st concert - SYNK: HYPER LINE(2023)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카메라나 쌍안경을 들고 무대를 조준 중이었다. 사실 매우 생소한 공연 관람 문화였기에, 주변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밌었다. 뒤에 앉은 분은 시작 전부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쉽게 놀라고 쉽게 감동하는 분이었는데, 아주 작은 연출 요소에도 쉽게 감응했다. 불이 꺼진다던가, 드럼소리가 나기 시작한다던가 할 때도 비명이 들렸다. 바로 뒷자리였기에 콘서트의 음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비명소리가 좀 더 또렷했다. 그런 와중에 윈터가 첫 곡에서 갑자기 일렉기타를 치기 시작했기에(나보다 10배는 잘 침) 비명소리는 기타솔로를 덮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런데 현장감도 느껴지고 다같이 공연을 본다는 느낌도 나서 그런 열렬한 반응들이 오히려 좋았다. 1층 플로어 제일 앞에 계신 분들은 대전차포처럼 생긴 카메라를 들고 무대를 찍고 있었다.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서 카메라 뷰파인더만 2시간동안 보는게 신기했다. 유튜브의 수많은 직캠들이 알고보니 그렇게 탄생하는 것이었다.


가장 듣고 싶었던 곡들도 전부 다 들어서 몹시 행복했다. 내적 환호도 최고조에 이르렀다. 도깨비불 무대 할 때 반투명 홀로그램 스크린 뒤에 서서 ae들과 함께 춤을 추는 연출이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멋졌다. 또 환복을 어떻게 이렇게 빨리 하지? 싶을 정도로 의상이 계속 바뀌었다. 대기업의 콘서트란 이런 것일까?


끝날 때도 그냥 끝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마치 앵콜을 유도하는 것처럼 공연이 너무 순식간에 끝났다. '감사합니다' 같은 멘트도 없이 무대가 암전되더니 그냥 공연이 종료되었다. 정말 끝나는 것처럼(비록 찐막은 아니더라도) 끝나겠거니 했는데 마치 차단기를 내린 것처럼 모든 것이 사라졌다. 당연히 다들 앵콜을 연호했다. 근데 5분간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내 뒤에 계신(쉽게 일희일비하는) 분이 '정말 끝난거 아니야?' 하면서 흐느끼기 시작했고 주변에서는 위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디선가, 마치 하늘에서 미지의 초월적인 존재가 강림하는 것을 위시해, 감미로운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제서야 어수선한 분위기는 조금 진정되었고 5분간 응축되었던 모든 에너지가 한꺼번에 발산하면서 공연장은 광란에 휩싸였다. 끝날 때는 제대로 끝났다. 이정도면 끝날 만하지! 싶을 정도의 연출이었다. 관객들에게 무대 인사를 하는데 구역별로 인사를 했다. 층별로 인사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101 인사… 102…. 103…. 블록 이름만 안 불렀지, 거의 인사 융단폭격이었기에 모두가 만족하며 퇴장할 수 있었다.


멤버별로 솔로 무대도 하나씩 했다. 당연히 커버일 줄 알았는데 이 곡들도 모두 신곡이었다. 생소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은 기존에 알던 곡들이 더 좋았다. 물론 새로운 곡들도 아직 익숙치 않을 뿐 분명 머지않아 좋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노래도, 건물도 좋아지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 현대건축의 핵심 정신은 모더니즘 비판이다. 세상을 표백시키는 무자비한 균질화의 마수에서 벗어나자는 기획이다. 모든 것을 규정하고 건물을 지을 수는 없다는 성찰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무표정한 건물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보다 온화해졌다.

잠실 실내체육관 준공(1979.4), 출처: 서울사진아카이브

원래 이 체육관은 탁구장이었다. <서울도시계획이야기>에 따르면, 1973년 한국 여자 탁구대표팀이 사라예보에서 열린 탁구선수권대회에서 무려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거뒀고('사라예보의 기적') 이를 계기로 탁구 전용 체육관 건립운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 탁구 전용 체육관을 김수근에게 의뢰한 것이었는데, 일이 커지면서 올림픽 경기장이 된 것이다. 88올림픽 당시에는 농구와 배구 경기가 여기서 열렸다. 아이러니한 것은 막상 탁구 경기는 서울대학교 체육관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올림픽 이후에 이 경기장은 각종 중규모 실내 행사를 개최하기에 안성맞춤인 활용도 높은 올림픽 유산으로 거듭난다. 어떻게 쓰일지 치밀하게 분석하고 철저하게 의도한 건물이다. 그런데 막상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면 세월의 무서움을 절로 체감할 수 있다.

2019 LCK Spring 결승전 (2019) *자료사진
새누리당 제3차 전당대회(2016) *자료사진
메가스터디 정시대입전략지원설명회(2011) *자료사진

노림수가 모두 실패했다고 이 건물을 실패작이라 평가한다면 오산이다. 3층에 앉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었다. 3층이지만 정말 자리가 좋다는 것이었다. 시야방해석이 하나도 없는데다 무대가 정말 잘 보였다. 진입로가 넓어 드나들기도 편했다. 1층 안 부러운 3층이라는 말이 많았다. 모든 예측이 다 빗나간 와중에도, 단 하나 빛나는 것이 있었다. 최선을 다해 무엇인가 노렸다는 결연함이다. 탁구는 한 경기도 치르지 못한 올림픽 탁구장의 에스파를 김수근 선생님도 분명 좋아하실 것이다. 모더니즘은 빗나가면서 비로소 완성된다. "광야는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무한한 잠재의 공간이다."

2023 aespa 1st concert - SYNK: HYPER LINE(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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