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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형 Jan 06. 2024

[2주간이주형]해 없는 해돋이 보기

2023 청산도 2박3일

12월 30일: 청산도 입항

2박3일간 상태도에 머물렀다. 상태도는 흑산도 남서쪽에 위치한 신안군의 작은 섬이다. 사실 신안에 간 게 아니라 청산도 펜션에 갔다. 펜션에는 방 번호가 없고 대신 방마다 섬 이름 문패가 붙어 있었다. 우리 방 이름이 상태도라면 옆방은 하태도, 다른 방은 외달도인 식이었다. 펜션은 여러 섬들이 모인 군도처럼 느껴졌다. 상태도에는 더블침대가 두 개 책상이 하나 있었다. 한참 전부터 난방이 된 것인지 장판이 깔린 방바닥은 찜질방을 방불케 하듯 따뜻했다. 평범한 펜션처럼 보이지만 커튼을 걷으면 신흥해변 전경이 펼쳐지며 펜션의 진가가 드러난다. 마음의 고향에 비로소 도착한 것이다.


청산도는 무려 네 번째 방문이었다. 우리는 2년마다 새해 해돋이를 보기 위해 청산도에 갔다. 일종의 해돋이 비엔날레였다. 서울 고속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최장거리 버스 노선은 서울-완도 구간이다. 휴게소를 두 번이나 들르며 장장 5시간이 걸리는 머나먼 길이다. 그런데 완도에서 다시 배를 타고 한 시간 내려가야 하는 섬이 바로 청산도였다. 청산도에 도착해서도 끝이 아니다. 선착장은 섬의 서쪽인데 버스를 타고 10km 남짓을 이동해야 섬 동쪽의 해변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가장 먼 땅. 시간마저 느리게 흐르는 청산도 신흥해변이었다.

12월 31일: 청산도 신흥해변
12월 31일: 카페 마르

점심에는 스콘을 먹었다. 펜션에서 밖을 내다보면 파도마저 느리게 이는 신흥해변이 있고, 해변 건너편에는 카페가 있다.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단층 오두막이다. 청산도 해변을 품은 <카페 마르>다. 이 카페는 2년 전에 처음 발견했다. 당시에 바다를 걷다가 이쁜 건물이 있길래 구경하러 갔는데 카페인 것을 알고 쾌재를 외쳤다. 섬에서는 커피 마시기가 쉽지 않다. 카페가 있더라도 영업시간이 불규칙적이라 기회가 있다면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이번에도 바다를 걷다가 카페에 가기로 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해변을 따라 카페로 갔다. 내부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기상악화로 청산도를 드나드는 모든 배가 결항되었기 때문이다. 나가야 할 사람은 못 나가고, 들어와야 할 사람은 못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강풍이 부는 해변을 가로질러 온 터라 섬에 갇힌 듯한 몰골을 하고 있었기에 카페 사장님은 우리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아이고 배가 끊겨서 섬에서 못 나갔구나!”


커피 세 잔과, 스콘, 에그타르트, 피낭시에 두 개를 주문했다. 정우준은 평소에 커피를 콩잿물이라고 부르면서 너무 졸린 경우가 아니라면 입에 대지도 않는다. 그런 정우준도 행복하게 커피를 마시는 곳이 바로 이 카페였다. 카페에는 목제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천창이 있고, 다락이 있고, 낮게 솟은 박공지붕이 있고, 바다가 보이는 긴 창문이 있고, 자리마다 전기난로가 있고.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다락에 앉았다. 전기난로를 켜자 금세 다락이 후끈후끈해졌다. 두 명은 책을 보고 한 명은 글을 썼다. 그러다가 정우준과는 오목을 뒀다. 느림의 섬이었지만 오목만큼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실내 한쪽 벽에는 방문객들이 남긴 메모지가 한가득 붙어 있었다. 김유진은 벽을 살피다가 2년 전에 우리가 남긴 흔적을 발견했다. 정우준이 그린 그림이었다. 어 뭐야 나네. 2년 전에도 우리는 똑같은 차림으로 같은 자리에 앉아 스콘을 먹었다. 


저녁에는 청산회정식을 먹었다. 자연산 광어와 자연산 문어가 상에 올랐다. 광어는 그렇다 쳐도 데친 문어가 어떻게 자연산이지? 자연산이라 확신한 이유는 그 문어를 잡은 낚시하는 분들과 함께 식사를 했기 때문이다. 오늘 문어를 잡았다며 감사하게도 우리에게 일부를 내어주신 것이었다. 그야말로 방금 잡은 청산도 문어였다. 니들은 점심 뭐 먹었냐? 저희는 스콘 먹었어요. 아니 왜 짜장면을 안 먹고(청산도 동부는 짜장면이 유명함) 빵을 먹었다냐! 이어서 각종 진귀한 음식들이 상에 올랐다. 태어나서 본 것 중 가장 큰 전복을 먹었다. 양식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는 것인지 청산도에 올 때마다 전복이 점점 커진다. 어찌나 전복이 큰지 내장만 따로 떼어도 일반 전복보다 컸다. 그렇게 연말을 보냈다.

1월 1일: 해돋이

다음 날에는 새벽에 일어나 해를 보러 갔다. 일출 보러 갈 때는 항상 조기기상이 문제였다. 겨울 해는 늦게 뜨는데도 그보다 일찍 일어나기가 고생스러웠다. 사 년 전에 사력을 다해 일어난 기억이 났다. 그 때는 누군가 일찍 일어나서 모두를 일시에 깨웠다. 자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방의 모든 불이 켜지더니 기상! 기상!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올해는 신기하게도 저절로 눈이 떠졌다. 자연스럽게 일어난 뒤 마치 출근하듯이 해를 보러 갔다. 밖으로 나가니 사장님이 이미 봉고차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던데 이상하게도 해가 이미 떠오른 것처럼 주위가 환했다. 하늘에는 온통 구름이었다. 무심히도 흐린 새벽하늘을 바라보면서 사장님이 어서 차에 타라고 손짓했다. '니들 해 못보겠다야!'


목섬 해를 보기로 했다. 목섬은 청산도 본섬과 방파제로 연결되어 있는 동쪽의 작은 섬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도착해 해가 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변 한쪽에서는 별안간 굿판이 벌어졌다. 누군가 하늘을 바라보며 꽹과리를 끊임없이 두드렸다. 일출을 기원하는 굿이라던데 어찌나 꽹과리 소리가 큰지 사람들이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많은 인원이 몰리자 급기야 방파제는 차가 막혔다. 교행을 할 만큼 넓지는 않은 길이었다. 그런 와중에 은연중에 해가 떠올랐던 것 같다. 하늘 어디를 보아도 구름이었기에 정확히 언제 한 해가 시작된 지는 알 수 없었다. 정신없는 가운데 하늘이 차차 밝아졌고 상서로운 기운이 일었다.


펜션으로 돌아갔다. 1층 식당에서는 사장님이 떡국을 끓이고 계셨다. 니들 해 봤어? 아뇨 못 봤어요. 불 꺼진 식당의 텔레비전에서는 전국 일출 명소 곳곳의 실시간 상황이 생중계되었다. ‘하동 금오산 정상, 해 안 보여’가 그 무렵 뉴스 제목이었다. 섬 밖의 다른 명소도 상황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리포터는 인파로 가득 찬 산 정상에서 여러 사람을 인터뷰했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애인끼리 등장해 저마다의 소원을 이야기했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에는 군수가 등장해 청산유수로 새해 덕담을 건넸다. 다 같이 산꼭대기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행복과 안위를 기원하는 모습이 새해다웠다. 보이지 않는 해가 떠오를지언정 새해의 정신은 밝게 빛났다. 사장님은 새해 첫 떡국을 끓여 주셨다. 니들은 눈치보지 말고 부족하면 더 갖다 먹어라! 주방에서는 거대한 스텐 가마솥 냄비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굴, 미역, 톳이 들어간 청산도 떡국이었다. 어느덧 해가 꽤 높이 떠오른 것인지 창문 밖이 밝았다. 떡국을 거의 다 먹어 갈 무렵 텔레비전에서 뉴스 속보가 나왔다. ‘하동 금오산 정상: 드디어 해 보여’가 소식이었다. 낮은 하늘을 답답하게 메운 구름 사이에서 해가 솟아오른 광경이었다. 아 스근하네. 멋지게 하루가 시작되었다.


사 년 전 청산도에서는 다 함께 다짐했다. 사 년 뒤 같은 장소에서 서른 살의 태양을 맞이하자! 법이 바뀌어서 서른 살이 되지도 않았고 날이 흐려서 해도 보지 못했다. 소원 비는 것을 깜빡했기에 청산도를 떠나는 배 위에서 중천에 뜬 태양을 바라보았다. 올 한 해는 건강하게만 해주세요. 프로젝트가 날아가지 않게 해주세요. 다들 물어보니 별다른 소원이 없다고 했다. 연말에는 내년을 야심차게 계획하기보다, 올 한 해를 잘 마무리하는데 집중했다. 다가올 해 목표를 세우는 대신 지나갈 해 결산을 했다. 연말에 일몰을 보러 서해안에 가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어쩌면 내년부터는 서쪽 바다에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해였다.

1월 1일: 목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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