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인
지난 2월 24일,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침범하면서 “우크라이나의 비무장, 돈바스 지역 내 러시아인 보호,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 조약 기구 유럽 연합 가입 저지 및 중립 유지”를 목표로 한 군사 작전을 실행하였다. 이후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이우를 비롯하여 우크라이나 전역에 미사일을 발사하였다. 이후부터 시작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지난 3일 100일은 넘겼으며 지금 역시도 두 국가는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치열한 열전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지금과 같았던 다른 전쟁들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 나는 아래에 각각 다른 사유로 생겨난 전쟁 7개에 대하여 조사, 작성하였다.
고대에 일어났던 전쟁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전쟁 중 하나인 페르시아 전쟁(정식 명칭 ;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고대 그리스 연합과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간의 전쟁으로 기원전 499년경부터 기원전 450년경까지 이어졌다. 전쟁은 이오니아라는 페르시아의 산하에 있던 그리스 연합의 도시 일부가 페르시아 폭군 타도를 목적으로 일으킨 반란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이 반란은 그리스 본토 국가였던 에레트리아와 아테네의 도움이 있었기도 하다. 반란은 당시 소아시아 지방에 제국을 세운 (현재도 이 제국의 크기는 역대 모든 국가 크기 중 13위로 이는 명나라, 마케도니아 왕국, 오스만 제국 그리고 로마 제국보다 거대한 크기이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 의하여 손쉽게 제압 당하였고, 이오니아 반란을 도왔다는 명분으로 페르시아는 서쪽으로 진군하며 그리스 산하의 해안 도시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시작된 1차 침공이었던 기원전 492년 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일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헬리스와 마케도니아라는 그리스 주변 도시들을 복속시키는데는 성공하지만 그리스 본토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며 약 2만명의 병력을 잃고 퇴각하게 된다. 하지만 490년 이어서 페르시아는 다시 한 번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국가를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당시 아테네 군은 아티카 지방 동쪽의 마라톤 평야에서 페르시아군을 상대하게 된다. 이 당시 페르시아는 약 함선 600척을 보내어 아테네와 함께 이오니아를 지원하였던 에레트리아를 정복하였고, 이후 그 군대가 그대로 마라톤 평원에 상륙하게 된 것이다. 아테네의 병력은 약 1만명의 군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렇게 수적으로 불리함에도 아테네는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승리하며 페르시아를 후퇴하게 한다. 이 당시 아테네 군의 전사자 수는 200명, 페르시아 군의 전사자 수는 6400명으로 막대한 인명 피해가 있었다. 후문으로 이 전투의 승전보를 가지고 아테네로 쉬지 않고 달려온 뒤 승리 소식을 알리고 죽었다는 한 병사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이것이 현대 올림픽의 마라톤의 유래가 된다.
하지만 이에 지치지 않고 페르시아는 10년간 재정비 후 다시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그리스로 침략하였다. (당시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보병 170만명, 기병 8만명이었다는 설이 있다.) 이번에는 아테네뿐만 아닌 스파르타와 테배 등 다른 그리스 도시들 역시 아테네를 지원하였고, 페르시아를 상대로 그리스 연합군은 아르테미시온이라는 협곡에서 맞서 싸웠다. 하지만 며칠 후 그리스 내부 배신자가 우회로를 알려주었고, 이후에는 영화 [300]에서도 묘사되듯 스파르타의 왕인 레오니다스가 스파르타인 300명 등과 결사항전을 한 뒤 그곳에서 전원 전사한다. 이후 육군은 아테네 입성에 성공하지만 해군은 살라미스의 바다에서 아테네의 해군에게 격퇴당하였고, 이후 퇴로와 보급로가 끊킬 것을 우려하여 페르시아 역시 퇴각하게 되었다.
물론 승자는 그리스였지만 이후 페르시아는 쇠퇴로 멸망하게 되고, 그리스 역시도 본토 내 이 전쟁으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양강 체제로 변화하고, 그 결과 두 도시국가 모두 서서히 힘을 잃게 된다. 이처럼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양 국가 모두에게 피해만 남았던 전쟁으로 남았다.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146년 사이 약 120년간 벌어졌던 전쟁으로 당시 두 최강의 제국이었던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세 차례에 걸친 전쟁을 이야기한다. 포에니 전쟁은 당시 지중해라는 무역 장소의 패권을 잡고 있던 강대국 카르타고와 신흥강국 로마라는 두 강국간의 패권싸움이었으며 사실상 지중해의 주인이자 앞으로 역사에 남을 최강국을 가릴 전쟁이었다.
제 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 ~ 기원전 241년)은 시칠리아라는 섬에 의하여 벌어지게 되었다, 당시 시칠리아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으로 이 곳을 장악하는 국가가 무역권의 전체를 가지게 된다고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한 두 국가 사이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결국 시칠리아 주변 해역에서 두 국가는 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결과는 해전에 능하던 카르타고의 손쉬운 승리였다. 카르타고 해군은 드레파나 전투에서 로마 해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이 패배를 발판 삼아 로마는 7년동안 해군을 재건하고 아에가테스 제도 전투에서 설욕한다. 이에 카르타고는 로마의 시칠리아 지배권을 인정하고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제 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년 ~ 기원전 202년)은 한니발이라는 카르타고의 장수 중 한 명이 스페인에 있던 카르타고의 세력을 유럽 중앙부로 진출시키며 스페인의 동부에 있는 로마와 친분이 있던 도시 사군툼을 공격하며 시작된다. 이후 한니발은 사군툼과 마르세유 등 로마의 식민도시들을 상대로 연이은 승리를 거두면서 알프스 산맥을 넘으며 로마의 본토로 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로마 내부로 들어가는데 성공한 한니발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남부 이탈리아까지 계속하여 로마를 상대로 전쟁하였고, 그 결과는 연전연승. 특히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로마의 사령관 중 한 명인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지연 전술로 로마는 시간을 벌었고, 카르타고는 추가 병력을 투입하지 않으며 한니발은 고립되게 된다. 이탈리아 외에 스페인과 그리스 등지에서도 전투는 일어났지만 끝내 이탈리아 제외 모든 지방에서 로마군이 승리를 거두고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근처에서 일어난 자마 전투에서 로마 사령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 의하여 카르타고는 결정적으로 패배하며 한니발은 로마에서 퇴각하고, 카르타고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로마에 물어주었으며 지중해 서부의 제해권과 이권을 로마에 빼앗기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제 3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149년 ~ 기원전 146년)은 로마의 사령관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카르타고에게 도저히 이행할 수 없을 정도로 강도가 높은 배상금을 주며 압박했고, 결국 카르타고가 배상금을 지불하지 못하자 이에 대하여 반발이라고 명분을 만드는데 성공한 로마군이 카르타고의 본토를 공격한다. 물론 카르타고 역시 2년여간 항전하기는 하였으나 이후 카르타고는 패배한다. 이 전쟁으로 카르타고는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십자군 전쟁은 중세 라틴 교회의 공인을 받은 원정대와 이슬람 군대 사이에 예루살렘과 그 근방의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종교전쟁(교황의 권력을 찾기 위한 전쟁)이다. 이교도나 이단의 토벌, 가톨릭 집단 내부의 분쟁, 정치적 이득 등 전쟁의 동기는 매우 다양했다. 하지만 시작은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제1차 십자군을 소환한 것을 최초의 십자군으로 본다. 당시 튀르크족에게 위협을 느낀 동로마 제국을 위한 군사원조가 그 명분이었다. 교황의 목적 중 하나는 무슬림들이 지배하고 있던 동지중해에 대한 순례자들의 안전보장이였기도 하다. 우르바노 2세의 대전략은 아마 1054년 동서 교회 분열 이래로 분열되어 있던 동방교회(정교회)와 서방교회(가톨릭)를 통합하여 자신이 그 통합된 기독교 세계의 수장이 되는 것이었을 것이다.
제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지중해 동해안에는 4개의 십자군 국가들이 세워졌다. 십자군에 참여한 의용병들은 공개적으로 서원을 세우고 교회의 면벌부를 수여받았다. 예루살렘에서 천국으로 단체 승천하게 될 것을 기대하거나 자신의 모든 죄를 신이 사해줄 것을 희망한 이들도 있었다. 종교적 동기 외에도 봉건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영광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 또는 경제적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서 참여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동지중해의 십자군 국가들은 결국 모두 멸망하면서 2세기에 걸친 성지 경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후 북유럽과 서유럽 내부에서의 십자군은 여러 번 더 이루어졌다. 12세기 후반에는 벤트 십자군이 조직되어 독일 일대의 비기독교 부족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13세기 초에는 독일기사단이 프로이센 지역에 새로운 십자군 국가인 독일기사단국을 세웠으며,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왕이 자신의 영토를 지중해까지 확장하기 위해 알비 십자군을 이용했다. 14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흥기하자 기독교 세계는 다시 십자군을 일으켰다. 하지만 1396년과 1444년 이슬람 세력에게 당한 연이은 대패로 가톨릭 유럽은 혼란에 빠졌다. 이후 계속하여 교전을 하던 이슬람과 가톨릭은 1453년 오스만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략시킨 것과 1492년 가톨릭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어인들을 몰아내고 그라나다를 정복한 것의 양대 대형 사건으로 두 종교의 관계가 최종적으로 매듭지어지게 된다.
약 2세기에 걸친 전쟁이었던 십자군 전쟁은 결국 어느 쪽의 승리라고 할 것 없이 두 세기동안 서로의 여러 명분을 위하여 싸웠던 전쟁이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희생자들만을 낳았다.
미국 독립전쟁은 18세기 경 영국과 영국령 13개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사이에 있었던 전쟁을 뜻한다. 현재 미국의 근원이 된 13개의 식민지는 당시 영국 본토에서 이주한 이주민들과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영국 본토는 인지세 법 등을 부과하며 세금을 증가하는 드의 차별을 가하였고, 결과적으로 이에 반발한 식민지들이 보스턴 차 사건이라는 일종의 보이콧으로 인하여 전쟁의 불씨가 켜지게 된다. 보스턴 티 사건은 보스턴 항에서 영국에서 수출하여 반 강제적으로 아메리카에 팔던 차들을 바다로 던진 사건으로 밀수입 되어 싸게 재배해 비싸게 팔던 당시 경제 상황에 반기를 든 일조으이 행위였다.
처음에는 영국은 보스턴 티 사건이 일어난 보스턴 항을 폐쇄하였고, 이후 그 인근 지방에 보복적인 법률들을 제정하였다. 이에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서로 결합하여 영국에 반기를 내세웠고, 결과적으로 식민지 민병대와 영국군 사이에서 1776년 렉싱턴 전투가 발발하며 전쟁은 시작된다. 당시 아메리카 독립군의 지휘관은 조지 워싱턴과 리처드 몽고메리 등이 있었고, 영국군은 당시 국왕이던 조지 3세가 직접 지휘한다. 처음에는 일종의 독립전쟁이던 미국 독립전쟁은 전쟁이 일어나고 2년과 3년 뒤, 각 각 영국이 패권을 장악해가던데에 두려움을 느끼던 프랑스 왕국과 스페인 제국의 참전으로 (3년 뒤인 1780년에는 네덜란드 공화국 역시 교전에 참여하였다.) 점차 승기는 아메리카 독립군에게 넘어갔고, 결국 프랑스-미국 연합군은 요크타운 전투에서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내며 독립에 성공한다. 당시 독립 전쟁의 참여했던 14개의 식민지(처음 보스턴 티 사건부터 영국의 반기를 든 13개의 식민지+1년 뒤 참전한 버몬트 공화국까지)는 이후 미국의 초기 14개의 주가 된다.
물론 이 전쟁이 훗날 미국이라는 국가를 만들기도 했고, 식민 지배를 탈피하게 도와주기도 하였지만 전쟁으로 겪었던 피해 역시 만만치 않았다. 당시 미국 독립군 2만 5000여명과 영국군 2만여명이 전쟁 중 사망했고, 이는 앞서 설명하였던 아메리카 독립군의 지휘관 중 한 명 리처드 몽고메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시대도 시대였던 만큼 전쟁으로 전사한 사람 수 역시 많았지만 천연두와 같은 질병으로 사망한 수 역시 많았다.
미국 남북전쟁 일명 아메리카 시빌 워는 미국에서 일어난 내전이다. 내전의 직접적인 원인은 노예제에 대한 의견 갈등이었다. 18세기 경 필라델피아에서는 당시까지는 만연했던 노예제를 반대하였고, 이어서 미국 북부에서는 차례대로 노예해방법을 통과시킨다. 이는 남부 미국에게는 큰 불안감을 주었다. 당시 미국 남부는 곡창지대로서 대농장이 존재하였고, 여기서의 대부분의 노동력은 노예들이었기에 노에제 폐지는 그들에게는 경제적인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861년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주들은 그들끼리 모여 남부연합을 형성하며 미합중국으로부터 분리를 선언한다. 이 과정에서 남부연합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찰스턴 항의 요새를 항의의 의미로 포격하면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당시 북부의 총사령관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당시의 미국 대통령이던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 또한 남부의 총사령관은 재퍼슨 데이비스였다. 당시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부의 미국 탈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평소 노예제 폐지에 찬성하던 링컨이 대통령이 되자 불안감을 느낀 남부에서 서둘러 움직임을 취한 것이다. 전쟁은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동부전선에서는 미시시피 강을 사이에 두고 교전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남부연합군이 수많은 승리를 거두며 연이어 전진하지만 미국 남북전쟁을 통틀어 가장 유명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북군이 승리를 거두며 전쟁의 판도가 북군에게 유리해졌다. 동부 전선에서는 큰 교전이 있었던 반면 서부에서는 북군의 일방적인 승리가 계속되었다. 얼마 안가 북군은 텍사스를 수복하였고, 이어서 캔터키, 내슈빌, 중앙 테네시에 이어 뉴 마드리드까지 손에 넣으며 빅스버그만을 눈앞에 놓고 있었다. 전쟁은 계속 진행되었고, 게티스버그 전투로 승세가 오른 북군은 미시시피를 회복하며 전쟁의 판도가 완전히 북군에게 넘어가게 된다. 연이어 애틀랜타, 앨라배마, 버지니아 등을 연이어 점령하며 전투는 거의 끝이 났다. 남부 연합군은 마지막으로 남은 병력을 모아 북으로 진군하려 했으나 그들은 탈영과 사상자로 인하여 수가 많이 줄어든 상태였고, 결국 파이브 포크스 전투에서 흑인 군대로 구성된 유니언 25부대의 손아귀에 떨어지며 남부연합은 4년여만에 항복을 하게 된다.
미국 남북전쟁에서는 전투가 길었던만큼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 당시 북군에서는 11만명, 남부 연합군에서는 26만명이 사망하였다. 특히 미국 남북 전쟁을 통틀어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온 게티즈버그 전투에서는 단일 전투에서만 남, 북군 통합 전사자 6,600여명, 부상자 32,000여명, 포로 및 실종 12,100여명이 나왔다.
제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이에 따른 영국과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전쟁 선포로 일어나게 된 전쟁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낳은 인류 최악의 전쟁이다. 전쟁은 나치 독일, 이탈리아 제국, 일본 제국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사이의 전쟁을 말한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바로 직전에 있었던 대규모 전쟁이었던 제 1차 세계대전으로 들 수 있다. 이 이 제 1차 세계대전은 최초의 인류의 대전쟁으로 총합 9,911,000명의 사망자와 21,219,500명의 부상자를 낸 전쟁이었다. 전쟁 이후 모든 책임은 패전국이었던 독일이 부담하게 되었다. 독일의 영토는 각각 프랑스, 벨기에, 덴마크 그리고 폴란드로 15%가량이 수탈 당하였으며 독일의 대포 5000문과 비행기 25,000대와 모든 함선들을 승전국에게 양도했으며 육해군을 합쳐 10만 명으로 제한하며, 항공전력은 금지당하였다. 또한 1,32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자신들이 가진 모든 식민지를 포기하게 되었다. 이 조약의 이름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이 조약으로 인하여 독일인들은 피폐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이 때 등장한 것이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였다. 히틀러는 독일에서 전쟁물자를 만들며 이를 통하여 돈을 얻었고, 독일인들은 가난하고 피폐했던 자신들에게 자금을 만들어주고, 빛 역시 청산하던 히틀러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나치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같은 파시스트 정권과 힘을 모아 자신들이 만든 전쟁 물자로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한다. 이후 독일은 폴란드와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을 점령하며 유럽을 점차 점령해나가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추축국은 세계 전체로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이탈리아는 아프리카와 동유럽을 침공하였고, 독일은 유럽을, 일본은 동아시아를 각각 침공하며 각자의 세력범위를 넓혔다. 대부분의 전쟁은 추축국의 승리로 장식되었고, 기세를 몰아 1941년 독일은 소련을 침공하였으나, 소련 특유의 강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하지만 이는 그 전까지 독일에게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소련이 독일에게 전쟁을 선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일본은 미국의 진주만을 선제 공격한다. 이에 미국 역시 일본과 추축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였고, 4대 강대국(영국, 소련, 중국, 미국)과 22개국은 연합국 공동 선언을 발표하며 제 2차 세계대전은 본격적인 세계화의 시작을 올리게 된다. 이후 추축국과 연합국은 서로 엎치락 뒤치락하며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승리의 여신은 점차 연합국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영국을 포함한 서방 연합국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펼치며 당시까지 독일의 휘하에 있던 프랑스를 수복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를 기준으로 동부전선(소련)과 서부전선(영국, 프랑스)는 독일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동유럽의 수많은 국가들은 이탈리아에 반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태평양에서는 미군이 일본군의 영토로 진격하게 되었는데, 1944년 일본은 필리핀 해 해전에서 패배하게 되며 추축국은 붕괴 위기에 놓이게 된다.
결정적으로 추축국이 붕괴된 사건은 1945년 서부전선의 연합군과 동부전선의 소련군이 엘베 강에서 만나는데 있었다. 이 사건 이후 일주일 뒤 베를린은 붕괴되었으며 독일의 수장 아돌프 히틀러가 지하벙커에서 자살하였다. 이어서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파르타잔에 의해 처형되며 어느 정도 추축국은 붕괴되게 된다. 결국 연합국의 지도자들은 포츠담 회담을 통하여 추축국측에 항복을 제의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은 포츠담 협정을 무시하였고, 미군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했다. 이어 소련군이 일본의 만주군과 관동군을 항복시키자 결국 1945년 9월 2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하며 제 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나게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은 여러 독립국들도 낳았고, 여러 기술력이 비약적으로 향상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다시는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데에 많은 국가들이 동의하며 국제 연합(UN)이 생겨나기는 했지만 이를 위해 치른 희생은 너무나도 컸다. 약 6천만 명이 사망했고, 이 중 군인은 2천만 명, 그리고 민간인은 4천만 명에 달하였다. 또한 전쟁 범죄 역시 극에 달하였는데, 독일은 유대인, 장애인, 동성애자, 정신질환자 등을 홀로코스트와 같은 단체 수용소에 가두고 생체실험을 하였으며, 일본 역시 포로 수용소를 노동 수용소로 이용하였으며, 중국이나 조선 같은 국가를 침공하여 그들의 생계를 방해하기도 하였다.
세상에는 수많은 전쟁들이 존재한다. 이 모습이 앞서 다뤄왔던 여러 전쟁들처럼 형태는 다를 수 있지만 결국 전쟁이라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에 불과하고 이로 인하여 생기는 인명피해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최근 일어나 현재 벌써 100일이 넘어가고 있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는 현재 양측 합하여 5만여명으로 추정되는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이 중 우크라이나 민간인 희생자 수만 4600여명이 된다. 또한 전쟁 피란민 수 역시 국외 피란민만 680만명, 국내 피란민은 7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전쟁은 민간인들의 삶에 참혹한 피해를 주게 된다. 앞서 발생된 여러 형태의 전쟁들 중 어떤 전쟁 역시 정당화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