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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파이 Oct 13. 2022

분열기를 끝낸 최초의 제국:진나라-공손앙과 변법

김동현


기원전 403년. 한(韓), 위(魏), 조(趙)로 삼 분열 되며 거대했던 진(晉)나라가 사라지게 된다. 이때쯤 제후들은 더 이상 주(周)황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정도의 세력을 갖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의 세력이 커짐과 동시에 주나라 황실의 힘이 약화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터이다. 덕분에 제후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제후가 아닌 ‘왕’으로 칭하며 중국 통일이란 대업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춘추시대의 막이자 전국시대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이중 서쪽의 진(秦)왕국은 과거부터 다른 나라들보다 야만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경제와 문화가 화북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서쪽 가장 끝에 있는 진나라는 당연하게도 뒤떨어지고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이 황량한 야만의 땅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조차 놀라울 지경이지만, 사실 다른 왕국에 병합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말 행운이 따랐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 미래가 보이지 않는 진 왕국에도 순풍이 불기 시작했으니, 국군(國君) 효공(영거량)과 법가의 거목 상앙(공손앙)이 그 시작이다.

진나라 제25대 왕으로 즉위한 효공은 뒤떨어지고 가난한 진 왕국을 다스렸음에도 패업을 이루고 싶다는 야망이 있었다. 그는 즉위 이듬해인 기원전 361년, 인재를 구하고 지식인을 환영하는 구현령(求賢令)을 내린다.


이때, 진 왕국의 또 다른 바람인 공손앙은 자신의 고향인 위(徫)국의 한계를 느끼고 일찌감치 위(魏)국으로 건너가 재상 공숙좌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공숙좌는 이미 공손앙의 빼어남을 알곤 국군 위앵(혜왕)에게 공손앙을 추천하려 하였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만 공손좌가 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이때 혜왕은 몸소 그의 병문안을 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자문을 물었고, 그는 곧바로 공손앙을 추천한다.


“공손앙의 재능은 저보다 열 배는 뛰어납니다. 제가 죽은 뒤 국정을 그에게 넘겨주십시오. 위국의 앞날이 그에게 달려있습니다.”


이에 위앵이 놀라 머뭇거리자 그는 곧바로 첨언했다.


“대왕께서 공손앙을 기용하실 수 없다면 그가 국경을 넘지 못하도록 죽여버리십시오. 일단 다른 나라가 그를 끌어들이는 날에는 우리 위국에게는 제일 큰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충신의 마지막 충언이었음에도 위앵은 굴러들어온 복을 온 힘을 다해 걷어차 버리고 만다. 공손좌의 말이 병으로 인한 헛소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후 위앙(魏昻)이라는 사람도 공손앙의 재능을 알아차리곤 위앵에게 그를 추천했지만, 위앵은 한번 정한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잘 찾아오지도 않는다는 두 번째 기회마저 걷어찬 것이다. 아마 위앵이 조금 더 똑똑하고 부하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자였다면 진나라와 위나라의 역사가 뒤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위 왕국에서마저 자신을 찬밥 취급하자 실망한 공손앙은 때마침 구현령을 선포한 진 왕국으로 때를 봐 건너갔다. 효공 영거량은 그와 네 차례나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공손앙이 바로 그가 찾던 인재임을 확인하곤 곧바로 대권을 넘겨주곤 개혁을 실시하라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잘 알지도 못하는 객경(客卿)에게 개혁의 칼을 맡긴 것이었다.

이후 공손앙은 그 유명한 ‘통나무 옮기기 작전’을 실행한다. 수도 역양(櫟陽) 남문에 10m 높이의 통나무를 세워두고 그것을 북문까지 옮기는 자에게 황금 열 냥을 상으로 준다고 한 것이었다. 구경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으나 아무도 도전하지 않자 공손앙은 상금을 오십 냥으로 올린다. 그제야 한 청년이 호기심에 머뭇머뭇 나와 통나무를 북문까지 옮겼다. 호기심 반, 장난 반으로 했던 그였지만 놀랍게도 공손앙은 그에게 약속대로 황금 오십 냥을 지급한다. 이는 국가와 백성 사이의 신뢰 관계를 구축함과 동시에 규칙(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백성들의 신뢰를 얻은 공손앙과 진 왕국 정부는 변법(變法)이라 불리우는 개혁을 단행한다. 아래는 개혁 내용을 11가지로 요약한 것이다.


1. 백성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배우게 하였다.

2. 도량형을 통일했다.

3. 지방정부의 체계를 세웠다.

4. 사회 조직의 기초를 세웠다.

5. 모든 국민에게 정당한 직업을 갖게 하였다.

6. 후한 조건으로 이민을 장려했다.

7. 생산을 장려했다.

8. 한 집안에 성인 남자가 둘 이상 있으면 분가하도록 했다.

9. 사람 간의 다툼은 법정 재판을 통해 해결하도록 했다.

10. 적과 싸우는 것이 1등 공적이었고, 상도 1등상을 주었다.

11. 전투에서 공을 세운 사람은 반드시 승진시켜 주었다.

-맨얼굴의 중국사/백양-


이를 통해 우리는 진 왕국이 얼마나 반야만적 상태에 있었는지와 공손앙이 ‘바꿀 수 있는 것’은 모두 바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진 왕국은 폭발적으로 성장하였으며, 기존의 야만적이라는 평가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못하던 어린아이가 순식간에 거인이 된 사건이었다.


역시나 개혁가의 말로는 좋지 못했다. 귀족가의 자제나 부자 상인의 자제에게도 정당한 직업을 갖게 하거나 가혹한 법으로 인해 불만을 품고 있던 자들이 효공 영거량이 죽자마자 공손앙과 변법에 대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결국 공손앙은 반역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거열형을 받으며 그 파란만장한 삶을 끝맺게 된다.

그러나 그의 개혁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본적으로 진 왕국의 폭발적인 성장이 있다. 맨얼굴의 중국사의 저자 백양은 공손앙의 변법을 이렇게 평가한다. ‘19년이라는 시간을 들인 끝에 진국은 위국(魏國)의 뒤를 이어 초강대국의 하나로 부상했다. 하지만 그 실력은 위국에 비해 백 배는 더 컸다.’

또한 공손앙의 변법은 이후 진 왕국이 중국을 통일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고 영정(시황제)이 중국을 통일한 후 진행한 개혁과 법가 제도의 기틀이 되었으며, 2200년 후에는 그 유명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본보기가 되기도 했다. 공손앙의 변법은 나라를 뒤바꿔버린 하나의 마술에 가까웠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맨얼굴의 중국사 2/백양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심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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