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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파이 Nov 01. 2022

과학의 역사 : 진리가 탄생하는 과정

이서하

  일반적으로 “과학”은 “진리”로서 생각된다. 과학적으로 밝혀졌다는 말은 곧 사실이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과학 지식들은 사실이 아니고 비합리적이였던 “과거 이론”으로부터 개정된 더 정확한 “최신 이론”으로 이루어져있다. 일례로 현재의 화학은 연금술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이번 기사에서는 이렇게 과학적이지 않은 것들에서 시작된 과학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첫번째 이야기, 산소의 발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발견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불의 발견은 절대 빠질 수 없을 것이다. 불의 발견으로 인간은 밤에도 열과 빛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요리를 해먹을 수 있었으며, 재련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인류의 불 발견은 약 150만년 전으로 추정되는 반면, 이 “불”이라는것이 격렬한 산화반응(산소와 결합하는 반응)이라는 것을 밝혀낸 것은 불과 3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이 불의 원리의 발견은 산소의 발견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첫번째 이야기로 산소의 발견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플로지스톤의 시작

  18세기 초반부터, 과학자들은 물질이 불타는 것을 설명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불에 타면 많은 물질들이 약해지며 부서지는 것을 보고 그 물질을 이루는 어떤 물질이 빠져나가게 되면서 구조가 깨지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과학자들은 빠져나가는 물질에 “플로지스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플로지스톤”이 포함된 물질이 곧 가연성 물질이며, 가연성 물질이 불에 타는 것은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는 현상이라는 “플로지스톤 이론”을 만들게 된다. 


17세기 당시 과학자들이 생각한 연소의 모습. 플로지스톤과 재로 이루어진 나무가 불타며 플로지스톤이 다 빠져나가 재가 된 모습이다.
현대 과학에서 설명하는 연소의 모습. 나무가 산소와 결합하여 재, 이산화탄소, 수증기로 변한다. 이때 이산화탄소와 수증기는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재만 보이게 된다


플로지스톤 이론

  플로지스톤 이론은 금속의 제련 또한 설명할 수 있었다. 금속은 금속성 재(현재 “산화된 금속”이라고 부르는 물질) + 플로지스톤으로 이루어져있으므로, 금속성 재는 플로지스톤이 빠진 금속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반대로 금속성 재에 플로지스톤을 다시 채워준다면 금속성 재는 다시 금속이 된다는 뜻이였다. 이를 위해서 대량의 플로지스톤을 가지고 있는 숯(숯을 태웠을때 남은 재는 숯에 비해서 매우 작으므로, 많은 플로지스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음)을 금속성 재와 함께 태우면 숯의 플로지스톤이 금속성 재로 옮겨지면서 금속성 재를 다시 금속으로 만들 수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당시 과학자들이 생각한 금속 제련 과정. 금속성 재를 포함하는 토양과 플로지스톤을 배출하는 숯을 한곳에서 태우면 금속성 재가 플로지스톤을 다시 머금어 금속이 되는 모습이다.
현대 과학에서 설명하는 철의 환원 과정. 산화철(III)가 일산화탄소를 만나며 산소를 빼앗기며 다시 철로 돌아간다.

  단순히 플로지스톤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현상이 불이라면 진공상태에서는 왜 연소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냐? 하는 질문에 당시 과학자들은 이론을 새롭게 추가하였다. 공기는 플로지스톤을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공기가 플로지스톤을 저장할 수 없는 진공 상태에서는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갈수가 없기 때문에 불타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였다. 마찬가지로 충분히 불이 타올라 더이상 공기가 플로지스톤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을때, 불이 자연스럽게 꺼진다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플로지스톤의 모순점

  그러나 이 플로지스톤 가설에는 큰 문제가 하나있는데, 금속의 경우에는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간 상태의 “금속성 재”의 무게가 그냥 금속의 무게보다 무겁다는 것이다. 물질이 빠져나갔는데 무게는 늘어나는 것이다. 어떤 과학자들은 플로지스톤이 음의 무게를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거나, 플로지스톤 때문이 아닌 어떤 다른 요소때문에 무게가 바뀐다고 주장했으나, 이에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낀 프랑스의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 Lavoisier, 1743~1794)는 하나의 실험을 계획하게 된다.


라부아지에의 등장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기획한 실험은 밀폐된 공간에서 금속을 연소시키는 실험이었다. 밀폐된 플라스크 속에서 금속을 가열하자 이전의 실험들과 마찬가지로 금속은 금속성 재가 될뿐이었다. 그러나 라부아지에의 실험이 특별했던 부분은 이 과정에서 플라스크 전체의 무게를 쟀다는 것이었는데, 이를 통해 가열 전의 무게와 가열 후의 무게가 같다는 것을 확인한 라부아지에는 외부물질의 출입 없이 플라스크 속의 물질인 금속과 공기만 가지고 연소반응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 밀폐되었던 플라스크를 열었을때, 공기가 빨려들어간다는 사실 또한 알아냈는데, 이 빨려들어간 공기의 질량을 재자 금속이 금속성 재가 되며 늘어난 질량과 같다는 것을 알아냈고, 라부아지에는 공기의 어떤 성분이 금속과 결합하여 금속이 금속성 재가 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 공기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 라부아지에는 다양한 화학자들이 연구를 통해서 알아낸 기체를 사용해 실험을 반복한 결과, 영국의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1733~1804)가 발견한 “탈플로지스톤화 공기”가 이 현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 “탈플로지스톤화 공기”를 Oxygen, 산소라고 다시 이름붙이게 된다. 


  산소가 발견된 이후에야 많은 화학자들의 실험을 통해서 물질이 산소와 결합하는 것을 “산화”라고 부르는 현재의 개념이 탄생하게 되었다. 크고 작은 모순들이 있던 플로지스톤 이론이 버려지는 순간이었다.




두번째 이야기,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신성재판장에서 나오며 한 것으로 유명한 ㅋ말이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있는 하나의 행성일 뿐이라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말이기도 하다. 두번째 이야기는 점성술과 천동설, 지동설에 얽힌 이야기이다. 


천동설의 시작

  천동설은 상상 이상으로 역사가 깊은 이론이다. 무려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Ptolemy, 10? ~ 17?)의 저술 『알마게스트(위대한 책)』부터 내려오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사실 천동설은 고대인들 때부터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어찌보면 당연한게 지표에서 사는 인간의 입장에서 내가 밟고있는 땅이 움직이는것보다는 하늘이 움직이는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천동설은 억지였을거라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그 역사만큼이나 상당히 체계적인 시스템이였다. 동심원과 주전원 등 개념의 도입으로 겉보기에는 굉장히 복잡하지만 실제로 관측되는 사실과 굉장히 비슷한 궤도 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이 궤도는 지금 보면 굉장히 정신없고 억지로 만든 것 같지만, 이때 당시에는 세상은 수학적으로 완벽한 구조라고  생각했고, 그 과정에서 완전한 도형이라고 생각했던 원을 이용하여 궤도를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복잡성과 별개로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천동설에 따라서 그린 행성들의 궤도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런 궤도가 실제 측정과 딱 들어맞았다고? 당시에 측정된 사실이 별로 없었거나 측정도구가 부정확해서 그렇게 보이는건 아니고?”라는 생각이 들어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지금에 비하면 측정 장비는 덜 정확했었지만, 단순히 저렇게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바로 점성술의 존재 때문이다. 점성술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별을 이용해서 점을 치는 기술인데, 천명 즉 하늘의 뜻을 궁금해하던 사람들은 정말 열정적으로 하늘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체계화하였다. 이렇게 모인 방대한 자료들을 이용해서 만들어지고 체계화된 천동설을 마냥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동설의 등장

  천동설이 입지를 공고히 하고있는 와중,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와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542)를 필두로 지동설이 등장 하게 된다. 초반에 지동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종교적인 이유로 탄압받았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고, 단순히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론이였다. 초기 지동설은 태양을 중심에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천동설에 비해서 훨씬 복잡한 형태였는데, 실제로는 타원인 궤도를 원으로만 표현하려고 한 결과였다. 딱히 기존 천동설에 모순점이 보이지도 않고, 새로운 이론인 지동설이 더 복잡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지동설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의 등장으로 상황은 달라지게 되었다. 케플러 역시 처음에는 수학적으로 완벽한 형태로 우주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당시에 엄청난 시력을 가져 천체관찰의 최고 권위자중 한명인 튀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의 정보를 가지고 연구를 하던 케플러는 혜성과 초신성(당시 우주는 완전하기에 새로운 물질이 생기거나 없어지는 일은 있어서는 안되었기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이런 천체는 우주의 완전무결함을 부정하는 존재였다), 화성의 속도변화(화성이 측절 구간/시기에 느려지거나 빨라지는 현상이 발견되었다)등의 존재를 알게되고, 우주의 수학적 완결성에 의심을 가진 그는 원 궤도를 포기하고 타원 궤도를 발표하게 되었다. 이 타원궤도가 현재 쓰고있는 궤도와 상당히 비슷한데, 이렇게 훨씬 단순하고 깔끔해진 지동설의 등장으로, 조금씩 형세가 기울기 시작한다.


뉴턴의 마무리

  이 천동설 vs 지동설 논란의 마침표는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이 찍게 되었다. 아이작 뉴턴은 지구의 물체, 하늘 위 우주의 물체는 모두 같은 물리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을 알아냈는데, 이를 통해서 지동설에서 일어나는 타원궤도 등의 모든 현상이 과학적인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를 통해서 지동설은 완전한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그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태양계 체계가 정리된 것이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과학은 과학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그때 당시의 이론들도 생각의 과정, 기술적 배경등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설득력 있고 합리적인 주장들이다. 모든 과학 이론들은 발전하는 것이고, 점점 더 합리적이고 깔끔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어쩌면 지금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사실들이 미래에는 비과학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아닐 수도 있을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있는 사실을 연구하고 응용하는 것 만큼이나 의심하고 탐구하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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