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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파이 Jun 06. 2023

해외 입양 1 : 한국은 어째서 아동수출국이 되었는가

황이안

 6 25 전쟁이 휴전을 맺었던 1953년, 수많은 전쟁고아 및 미군과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의 존재가 부각되었다. 이에 당시 이승만 정권은 전쟁고아들에게 보다 나은 환경을 제공하고, 미군 혼혈아들을 아버지의 나라로 돌려보낸다는 명목 하에 본격적으로 해외입양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수많은 아이들을 감당할 여력이 안되었고, 서양 국가에서는 막 전쟁을 마친 한국의 고아들에 관심을 갖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이해관계가 있었기에 많은 아이들을 서양국가로 입양 보낼 수 있었다. 

 1961년, 박정희 정권 집권 이후로는 해외 입양이 공식적으로 제도화되었다. 1961년 9월 30일 [고아입양특례법] 이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고아입양특례법] 은 ‘외국인이 대한민국국민인 고아를 양자로 함에 있어서 간이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고아의 복리증진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 고 밝힌 법이다. 이 법이 통과되자 해외 입양 절차는 법에 근거해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고아입양특례법은 입양 특례법이 제정되며 폐지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1960년대 대한민국은 흔히 베이비붐이라고 불리는 출생률 급상승기를 겪고 있었다. 당시 합계출산율은 약 6명으로 후진국 중 출산율이 가장 높았고, 인구 성장률은 연 3%에 달하며 약 23년마다 인구가 3배가 되는 인구폭증현상이 나타났다. 출생률이 급상승함에 따라 0-14세 유소년은 전체 인구의 약 42.3%를 차지했지만 15-64세의 생산연령은 약 54.8%에 불과했다. 유소년 부양 부담이 급증한 것이다. 국가에서는 산아제한 정책 등의 인구 정책을 내놓으며 유소년 부양 부담 및 인구 급증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고, 해외 입양 역시 이의 일환으로 활용되었다. 국가는 미혼모 혹은 극빈층 가정의 아이들을 해외 입양 보냄으로써 복지 지출을 대폭 줄일 수 있었다. 

 물론 당시 정부가 해외 입양만을 해결 방안 삼았던 것은 아니다. 정부는 국내입양 비중을 높이고자 ‘국내입양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입양기관들은 국내 입양 수에 비례하여 해외입양을 수를 배당하는 할당제를 도입했다. 매년 국내 입양을 10%씩 늘려 1985년에는 해외 입양을 중단하겠다는 목표도 있었다. 해외 입양에 의존하지 않고 국내 입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70년대를 지나고,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그 본질과 방향성은 완전히 바뀌어갔다. 


 이전까지 해외 입양은 전쟁고아, 혼혈아, 기아, 미혼모 혹은 극빈층 가정의 자녀를 위한 복지의 일환으로 취급받아왔다. 미혼모 가정 혹은 극빈층 가정에서는 아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해외 입양을 보내었기에 시각에 따라서는 해외 입양은 국가와 가정이 서로 윈윈(win-win)하는 과정이었다고 바라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전쟁의 피해가 회복되고, 경제가 급성장하던 1970년대 후반 해외입양은 오히려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1980년 전두환 정권 집권 이후 한국은 세계 최고의 ‘아동수출국'이라는 타이틀을 따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전두환 정부는 해외 입양을 ‘이민확대 및 민간외교'라는 명분으로 활용하였고, 해외 입양 자율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수치가 고조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1980년대 10년간 약 65,321명의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되었다. 아이들은 북유럽과 서유럽 국가들, 그리고 캐나다와 미국으로 입양되었는데 대다수의 아이들을 입양했던 미국의 한 신문에서 눈에 띄는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1988년 미국 신문 <progressive>에 따르면 당시 한국 아이 한 명을 해외 입양 보낼 때마다 5,000 달러가 국내로 유입되었다. (1988년 12월 말 달러 환율은 684.1원이었다. 아이 한 명 당 342만 500원의 돈이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이 4,751달러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5,000달러는 더 큰 가치를 지닌다.) 신문이 발간된 1988년 한국은 총 6,463명의 아이들을 입양 보냈으니 총 3,200만 달러를 벌어들인 셈이다. 해외 입양이 돈이 되기 시작하자 급기야는 수월한 입양을 위해 친부모가 생존해 있는 아이들 마저 고아 호적을 발급받아 고아로 속이거나 허위 사실을 기재해 서류를 구비하는 일마저 벌어졌다. 이러한 일은 일부의 사례가 아닌 1980년대 해외 입양을 위한 하나의 관행이었다. 많은 아이들이 고아가 아님에도 고아가 되어 해외로 입양되었고, 허위 사실을 기재한 조작된 서류로 입양국의 규정을 통과했다. 일부 친부모들은 아이를 해외 입양하는데 동의한 적 조차 없으며, 아이가 입양되었다는 사실마저 뒤늦게 알아야 했다. 


 이는 해외 입양이 대한민국의 산업으로 자리 잡았음을 증명한다. 아이들은 민간외교와 외화벌이의 목적으로 사용되었고, 한국은 아이들을 입양 보내는 것이 아닌 수출하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최대 출생률을 기록했던 베이비붐 시대를 지나 최저 출생률을 기록하고 있는 지금, 여전히 아이들은 해외로 입양되고 있다. 이제는 정말 해외 입양을 멈춰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왜 해외 입양을 반대하는 걸까? 왜 해외 입양이 나쁜 걸까? 역사와 통계가 말해주지 않는 상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해외입양인들이 해외 입양을 이유로 그들의 삶에서 고통받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적 사실이나 통계만을 통해 해외 입양을 보아서는 안된다. 우리가 진정 봐야 할 것은 입양되었던 아이들의 삶과 그들이 끌어안아야 했던  상처와 고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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