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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파이 Jun 07. 2023

지강헌은 범죄자인가 선구자인가

;80년대 지강헌 사건 돌아보기/이지인

 1988년 10월 16일, 국민들을 가슴죄이게 만든 한 인질극이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겠다는 탈주범들의 처절한 외침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1988년 10월 8일, 영등포교도소에서 대전과 공주교도소, 공주치료감호소로 이송되던 범죄자 25명 중 12명이 교도관을 흉기로 찌르고 탈주하여 서울시내로 잠입하면서부터였다.


탈주극을 벌인 지 7일째 되던 날인 10월 15일 밤 9시 40분경, 최후까지 잡히지 않았던 5명 중 4명은 경찰의 검문을 피해 일반 가정집인 서대문구 북가좌동 고 씨의 집에 잠입해 그의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 지강헌 (당시 34세), 안광술 (당시 22세), 강영일 (당시 21세), 한의철 (당시 20세)이 그들이었다. 그들의 대담한 ‘인질숙박극’이 계속되고 있을 무렵, 명일 새벽 4시경 인질로 잡혀있던 고 씨의 신고 전화로 경찰 병력 1천여 명이 집 주위를 포위했다.

 "이 바보들아! 나는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어!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지만, XXX들. 난 그동안 생각했단 말이야! 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기 인생을 버렸단 말이야! 그런데도 결국 오늘 이 사회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서 노태우 대통령, 국민을 위한! 국민을 위한 노태우 대통령!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고 있어!"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 사는 게 이 사회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겠다. 돈이 있으면 판검사도 살 수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우리 법이 이렇다.”


 지강헌의 처절한 외침은 경찰 1천여 명, 동네 주민을 넘어 전국에 울렸다. 

560만 원 절도를 저지른 자신은 무려 17년을 살아야 되는데,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만 70여 억 원을 횡령한 전경환(전두환의 막냇동생)은 겨우 7년을 선고받은 사실에 큰 무력감과 비통함을 느꼈던 것이다. 

지강헌은 창문을 깨고, 이후 깨진 유리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 시도를 했다. 이때 이를 지켜본 인질이 충격으로 인해 비명을 지르자 경찰특공대는 그가 인질을 위험 상황에 처하게 한 것으로 판단하여 무방비 상태의 지강헌의 다리와 옆구리에 총을 발사했고, 몇 시간 뒤 세브란스병원에서 제대로 된 수술도 받지 못한 채 사망한다.

 탈주범 중 유일한 생존자이자 당시 막내였던 강모 씨는 사건 이후 경찰에 검거되었다. 선고 공판에서 검찰은 15년을 구형했지만, 그는 7년 형만 받았다. 사건 당시 그에게 인질로 잡혀있던 사람들 중 일부가 그를 위해 써준 탄원서 덕분이었다. 


 “평범하고 단란한 우리 가정에 그날은 잊을 수 없다. 처음에는 모두 겁을 먹었지만 이들의 행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부드러워졌다. 이들에게서 나쁜 냄새가 아닌 인간다운 눈빛을 읽었고, 후회의 마음도 읽을 수 있었다”
- 탄원서 내용 中 일부 


 오늘날 그들의 행동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무모했고, 폭력적이었으며, 그들의 이러한 행동으로 일부 사람들은 평생 남을 트라우마를 안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의 범죄 사실이 정당화되어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맹목적인 비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수면 위로 드러냈다는 점에 있었다. 왜 그들은 이러한 폭력적인 방법으로 목소리 낼 수밖에 없었는가? 수많은 국민들이 지강헌의 발언에 공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약 40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이 사건이 계속해서 재조명되는 이유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낭만적인 바람막이 하나 없이 이 사회에서 목숨을 부지하기에는 너무나 살아갈 곳이 없었다"


당시 영상:Police 지강헌 사건유전무죄 무전유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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