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어머니>를 읽고

책 <어머니> : 빠벨의 동지들 모두 그를 어머니라 불렀다 1부

by 와이파이


막심 고리끼 책의 구절을 통해 본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의 삶




수년에 걸친 착취가 그들의 식욕을 앗아가,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먼저 불타는 보드카가

연약한 위장을 쓸고 지나가야만 했다.”

- 막심 고리키 '어머니' 중


1890년대 제정 러시아의 사회상을 작가 막심 고리키는 소설 <어머니>를 통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제정 러시아 말 로마노프 왕조는 군주제 유지를 위해 인권, 언론, 결사의 자유를 탄압하였다. 이에 더해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러시아는 물자부족과 가난과 열악한 노동조건, 빈부격차로 러시아 민중들의 삶은 책의 구절처럼 착취로 점철된 삶이었다. 하지만, 탄압받은 민중과 노동자들은 착취당하는 삶을 견디지 않았다. 자본가, 공장장으로부터의 억압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정부의 추적을 피해 다니며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회운동가들이 있었다.


mosaEJgKu2.jpeg?type=w720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막심 고리끼의 소설 <어머니>가 있다.


주인공 어머니 닐프로냐는 강제 추행으로 맺어진 결혼과 그 후 알코올중독자인 남편의 가정폭력을 겪은 인물이다. 남편이 죽고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 빠벨이 남편을 닮아 술주정뱅이가 될까 걱정하지만, 아들은 남편과 달리 책을 읽고 어머니에게 살갑게 대한다. 어느 날 빠벨은 어머니에게 노동자운동을 하고 있고, 정부의 감시를 피해 집에서 동지들과 모임을 가져도 되겠느냐 말한다. 어머니는 아들의 말에 적잖이 놀라지만, 그와 동시에 세상을 바꾸려는 아들에 대한 자부심을 느낀다. 어머니는 아들 빠벨을 통해 노동운동가들을 만나고 그들의 모임을 지켜보며 남편에게 고통받아왔던 과거를 돌이키며 아들의 운동을 지지하게 된다. 어느 날 빠벨이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일깨우는 전단을 뿌리고, 시위에 앞장서자 경찰은 빠벨을 구금하고, 아들의 일을 어머니가 대신 맡아 사람들에게 전단을 몰래 배포하는 일을 맡게 된다.


<어머니>는 한국에서 박정희 정권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지만 민주화 운동권 사람들이 해적본을 만들어 배포할 정도로 1980년대 민주화 운동권의 필독서였다. 빠벨의 어머니가 아들을 통해 노동 운동가로 각성하는 과정은 비단 책 속에만 있지 않다. 책의 내용이 러시아 소르모프 메이데이 시위의 노동자 뾰뜨르와 그의 어머니 안나의 이야기를 각색해 풀어낸 이야기인 만큼,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도 빠벨의 어머니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전태일 노동자의 분신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진보에 큰 역할을 했던 어머니 이소선 열사, 그리고 이한열 열사의 죽음 이후 사회의 다양한 비극에 앞장서 달려가는 어머니 배은심 여사이다. 책 <어머니> 속의 어머니 닐프로냐와 한국의 이소선 열사, 배은심 여사의 삶을 통해 한 아들의 어머니가 세상의 상처받은 이들을 품는 모두의 어머니가 된 일생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1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_이소선 여사


빠벨이 공장에서 노동자를 일깨우는 전단을 뿌리고 시위에 앞장서자 러시아 순경들은 빠벨의 집에 들이닥친다. 하지만 빠벨이 잡혀갈 것을 미리 예감하고 있던 어머니와 빠벨의 대화는 오히려 담담하다.
[ 잘 가거라 빠샤, 필요한 건 모두 챙겼니?]
[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스도가 너와 함께 하시길…….]
하지만 아들이 순사들에게 끌려가고 텅 빈 집에서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상실과 슬픔, 권력에 대한 무력감과 분노를 느끼며 흐느끼기 시작한다.


"그가 잡혀 가자 어머니는 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눈을 감고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벽에 등을 기대었다. 슬픈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무력감을 생각하면 그저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오래오래 흐느껴 울었다. 마치 상처받은 가슴의 고통을 그 울음에 담아 흘려보내기라도 하듯이. 그녀의 눈앞에 붙박여 있는 얼굴과도 같이 드문드문 콧수염을 기른 누런 얼굴이 우뚝 서서 잔뜩 찡그린 두 눈으로 만족스럽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가슴속에서는 진실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자기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간 사람들에 대한 울분과 적개심이 시꺼먼 소용돌이가 되어 휘둘고 있었다. "


어머니가 느낀 울분은 어린 여공들의 노동인권을 외치다 분신한 전태일 열사와 어머니 이소선 열사의 마지막 대화와 맞닿아있다.
전태일 열사는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에서 “정부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분신했다. 병원으로 옮겨진 전태일 열사는 생을 끝맺기 전 어머니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1“어머니, 내가 3분 있다 죽을지, 10분 있다 죽을지 모르니…… 내가 말하는 것 잘 듣고 엄마 꼭 들어주세요. 학생들하고 노동자들하고 합해서 싸워야지 따로따로 하면 절대로 안돼요. 캄캄한 암흑 속에서 연약한 시다들이 배가 고픈데, 이 암흑 속에서 일을 시키는데, 이 사람들은 이대로 가면 전부 결핵환자가 되고, 눈도 병신 되고, 육신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게 돼요. 이걸 보다가 나는 못 견뎌서, 해보려고 해도 안 되어서 내가 죽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좁쌀만 한 구멍이라도 캄캄한 데 뚫리면, 그걸 보고 학생하고 노동자하고 같이 끝까지 싸워서 조금씩 구멍을 넓혀서, 그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할 일을,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 …… 내가 부탁하는 거 꼭 들어주겠다고 크게 한번 대답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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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전태일 열사의 마지막 말에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네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라고 두 번 세 번 답했다. 아들 전태일 열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소선 여사는 국가가 전태일 열사의 요구(근로조건 개선과 노동조합 결성 등)를 약속하기 전까지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시체인수를 거부하고 버티었다. 빠벨의 어머니처럼,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진실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아들을 잃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울분은 전태일 열사와의 약속을 지켜가는 길이 된다.


"그들이 떠나고 나자 그녀는 문을 잠그고 방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앉아 빗소리에 맞추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말없는 기도였다. 오직 빠벨에 의해 그녀의 삶 속으로 이끌려진 삶들에 대한 끝없는 생각뿐이었다. 그들은 마치 그녀와 성모상 사이를 헤매는 것 같았다. 평범하고 이상하리만큼 서로 친밀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외로워 보이는 그들이었다.


- 빠벨을 대신해 어머니가 공장에 유인물을 뿌리기로 결심한 후의 장면


빠벨의 어머니처럼, 이소선 여사는 전태일 열사에 의해 그녀의 삶 속으로 이끌려진 노동자들의 권리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다. 이후 이소선 여사는 41년간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다. 1970년 11월 27일 전태일 열사의 뜻을 이어받아 청계천에는 청계피복노조가 결성되었다. 이소선 여사는 청계천 공장의 작은 방을 빌려 여공들에게 노동 권리에 대한 교육을 하는 노동교실을 만든다. 이소선 열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노동교실은 청계천 노동자들의 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 정권은 노동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청계천에 남아있는 전태일 열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전태일 열사의 수기, 일기를 불온하며 이를 읽는 것은 북한에 동조하는 것이라 선언한다. 또한 청계피복노조를 기업의 편인 어용노조로 만들기 위해 회유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소선 열사와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이 노동 권리를 외치며 투쟁하자 박정희 정권은 청계피복노조를 와해시키기로 결정한다. 그 수단이 바로 이소선 열사가 운영했던 노동교실을 강제폐쇄하고 이소선 열사를 구속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이소선 열사는 징역 1년을 살고 나왔다. 이후 전두환 정권 또한 청계피복노조를 와해시키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하지만 이소선 열사는 그에 맞서 청계피복노조를 지켜내었다.
전태일 열사에 의해 이소선 여사의 삶 속으로 이끌려진 이들은 어린 여공과 청계천 노동자뿐만이 아니었다. 노70년대 노동운동에서 이소선 여사는 노동자의 탄압이 있는 모든 현장에서 연대를 외치고 노동자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소선 여사는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심하게 구타당했고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의 장례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수배를 당하기도 한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쳐 1990년 전국노동조합 협의회가 결성되고 이소선 여사는 전노협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이소선 여사는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정부에게 쫓기는 민주화 인물들을 숨겨주고 지켜주었다.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피해자의 가족들을 위로하고 정부의 시체 탈취에 맞서 싸웠다. 또한 구속된 민주화 세력의 부모들과 연대해 구속자가족협의회에 참여하고 이후 민주화유가족협의회를 만들었다. 이소선 열사는 약자를 향한 권력이 탄압, 죽음이 있는 곳은 어디든 달려갔다.



@이육샛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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