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인
[제주 4.3 사건 돌아보기]
산들바람이 옷깃을 스치던 따뜻한 봄날, 제주에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사건의 발단은 1947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행사로부터 시작된다. 오후 2시 45분경, 기마경관 소속의 경위 중 한 명이 제북교에서 관덕정으로 들어서는 길 모퉁이를 돌려할 때 고빗길에서 그 길을 서성대던 어린이가 그가 타던 말의 발굽에 차이는 사고가 발생한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그 길을 지나간다. 분노한 군중들은 경찰을 비난하며 몰려들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군중들의 돌팔매질이 행해지며 거리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경찰서에 있던 경찰들은 이를 군중의 경찰서 습격으로 오해해 응원경찰들과 함께 관덕정 주변의 사람들에게 발포하기 시작했다. 이 일로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람을 죽인 경찰은 사과해라”, “책임자를 처벌하라” 제주 시민들의 강력한 외침이 제주를 감싸 돌았다. 제주도 내 기관, 학교, 회사 총파업에 들어갔다. 이에는 무려 95%가 동참했다.
그로부터 약 1년의 시간이 흐른 1948년 4월 3일 새벽 산과 오름에 봉화가 켜지기 시작하였다.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내의 좌익 무장대의 경찰서 습격. 이로 인해 경찰, 우익인사와 그의 가족들이 사망한다. 하지만 이 날 반란을 일으킨 무장대는 총기가 턱없이 부족하여 대다수가 칼, 죽창, 몽둥이만 들고 나섰을 정도였다. 이는 경찰과 군 병력에 비하면 상당히 약체였다. 군경은 4월 3일의 무장반란을 선동으로 인한 무장폭동으로 규정했다. 그로부터 지옥 같은 날들이 시작되었다.
군경토벌대는 중산간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폭도로 간주해 학살했다.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는 경우에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가족끼리 뺨을 때리게 하기도 했으며, 총살자 가족에게 총살당하는 사람을 보게 하는 동시에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비인간적인 행동이 계속되었다.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마구 구타했다. 초토화작전은 1949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토벌대의 학살은 수많은 고귀한 영혼을 나락으로 빠뜨렸다.
1949년 진압과 함께 선무작전이 병행되었으며,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6월,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오라리에서 경찰의 발포로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아, 너무도 불가사의하다. 믿을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전대미문이고 미증유의 대참사이다. 인간이 인간을, 동족이 동족을 그렇게 무참히 파괴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의 죽음이 아니다. 짐승도 그런 떼죽음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의 무고한 희생과 상처로 얼룩진 이 사건은 더욱 활발히 재조명되어야 한다.
출처 및 참고자료
진상규명과 은폐·왜곡 간 치열한 기억 투쟁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310483
제주도민 열명 중 한 명이 학살된 대한민국 비극사 _제주 4.3 사건
https://ch.yes24.com/Article/View/21806
[사회를 여는 창] 우리 현대사의 아픈 역사, 제주 4.3 사건
http://www.wk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0783
사람 사는 동굴 입구를 막고 불을 질렀다... 백골 시신이 말해주는 제주 4.3사건의 진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