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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파이 Oct 02. 2023

핵개발에 도전한 사람들

: 하이젠베르크, 오펜하이머, 쿠르차토프 그리고 텔러 / 김가빈

 인간이 만든 가장 파멸적인 무기인 핵무기는 지난 80년간 전 세계를 공포와 불안, 그리고 아픔의 늪으로 몰아넣었고, 이제는 우리의 매래를 위협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핵무기는 도대체 왜 만들어진 걸까? 이번 기사에서는 핵무기를 개발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 이야기를 풀어 나가 보겠다.     



프롤로그: 핵분열의 발견

 

 1938년 겨울, 눈 덮인 베를린의 시내 속 한 실험실에서 인류 역사를 바꿀 하나의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명성 있는 독일인 화학자 오토 한(Otto Hahn)과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ßmann)에 의해 진행된 이 실험은, 기본적으로 중성자를 우라늄 원자핵에 충돌시키는 실험이었다. 어떻게 보면 간단해 보이는 실험이지만 이 실험의 결과가 나오자 실험실에 있던 모두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중성자에 의해 강타된 우라늄 원자핵이 두 개로 쪼개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원자핵은 절대 쪼개질 수 없다고 여겨졌던 당시 과학계의 관점에서 볼 때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얼마 후, 스톡홀름에서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는 매우 흥미로운 연락을 받게 된다. 바로 앞서 ‘말도 안 되는’ 현상을 발견한 오토 한의 연락이었다. 오토 한은 그가 발견한 현상을 마이트너에게 설명하며 조언을 구했고, 호기심이 동한 마이트너는 직접 실험에 착수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진행된 실험에서 그녀는 우라늄 핵을 바륨과 크립톤으로 쪼갤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원자핵은 2개의 중성자와 엄청난 양의 핵에너지를 방출한다는 확실한 사실을 밝히게 된다. 

오토 한과 리제 마이트너

 '핵분열'이라고 명명된 이 현상은 1939년 논문으로 발표되었고, 전 세계의 과학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핵분열로 인한 동요는 과학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곧 핵분열로 인해 온 세계가 뒤바뀔 예정이었다.



하이젠베르크: 핵무기 개발의 시발점


 오토 한이 베를린에서 처음 핵분열을 발견했던 그 순간, 같은 도시의 총통 청사에서는 유럽을 집어삼킬 거대한 전쟁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파시즘 전체주의 체제하에 있었던 당시 독일의 지도자였다. 히틀러에게는 원래부터 유럽 정복이라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그런데 전쟁에서 프랑스, 영국 같은 유럽의 다른 강대국을 이기기 위해선 첨단 신무기가 필수적이었다. 때문에 고심하고, 또 고심하던 히틀러의 귀에 어느 날 핵분열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게 된다. 히틀러와 나치 독일은 여기서 힌트를 얻었다. 우라늄으로 예를 들었을 때, 중성자가 부딪혀서 우라늄 핵이 분열하면 우라늄은 분열됨과 동시에 중성자 2개와 핵에너지를 방출한다. 그런데 이때 방출된 중성자가 다른 우라늄 핵에 부딪히게 되면, 그 우라늄 핵도 분열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핵분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연쇄반응>이라고 한다. 자, 한 번 상상해 보자. 한 번의 분열로도 큰 핵에너지를 방출하는 우라늄 핵이 연쇄반응을 거치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양의 핵에너지를 방출하게 될까? 그리고 이 현상을 이용해서 무기를 만들면 얼마나 파괴적인 무기가 될까?


 핵분열을 이용하여 무기를 만들기로 결심한 히틀러는 역사상 처음이었던 이 프로젝트를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에게 맡겨보기로 결정한다. 하이젠베르크는 당시 독일을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물리학자 중 하나로 양자역학의 기본적인 이론을 정립하고 '불확정성의 원리'를 밝혀내며 31살의 나이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불세출의 천재였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우란프로옉트(Uranprojekt)라는 이름의 기념비적인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프로젝트는 하이젠베르크의 진두지휘 아래에서, 초반부터 꽤 많은 이론적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역사상 가장 파멸적인 무기가 히틀러의 손에 들어올 날이 머지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감에 휩싸여 이렇게 되뇌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란프로옉트는 여기까지였다. 초반에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기대감, 혹은 불안감을 외면한 채 우란프로옉트는 더 이상의 유의미한 성과를 내지 못하게 된다.


우란프로옉트

 우란프로옉트가 실패한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독일 정부의 의지 부족이었다. 히틀러가 핵무기에 큰 관심을 가졌었던 건 맞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당시 핵무기 개발의 미래는 너무 불투명했다. 그래서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히틀러는 즉각 투입할 수 있는 또 다른 신무기인 V2 탄도 미사일을 더 선호하게 되었고 우란프로옉트는 등한시하게 되었다. 또한 독일의 반(反) 유대인 정책도 우란프로옉트의 실패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과 같은 사례에서 볼 수 있듯, 20세기 초중반 물리학자의 상당수가 은 유대인이었다. 그런데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으로 유능한 물리학자들 상당수가 독일을 빠져나왔으며 결국 우란프로옉트에 동원될 수 있었던 과학자들의 수가 상당수 줄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우란프로옉트의 주인공인 하이젠베르크도 프로젝트 실패에 적잖은 책임이 있다. 하이젠베르크가 당대 최고의 이론 물리학자 중 하나라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지만, 문제는 그가 이론에만 너무 치중했다는 점이었다. 핵무기를 개발할 때는 실험이 필수적인데 하이젠베르크는 실험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고 때문에 프로젝트는 이론을 벗어나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가 의도적으로 프로젝트를 방해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해서 우란프로젝트에 참여한 많은 과학자들은 독일이 핵무기를 만들 역량이 없다고 보았고, 또한 핵무기의 위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프로젝트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거나 심지어 사보타주(sabotage: 비밀 파괴 공작, 방해)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1945년, 독일은 모든 전선에서 패주했으며 연합군은 독일 국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우란프로옉트는 매우 초라한 종지부를 찍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하이젠베르크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란프로옉트를 탄생시킨 히틀러가 자살한 지 3일 뒤인 1945년 5월 3일, 하이젠베르크는 미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러나 ‘악의 제국’에 협력하며 파멸적인 무기를 만들려 했다는 악명에도 불구하고, 그가 의도적으로 우란프로옉트를 방해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어서 그는 다음 해 석방되게 된다. 이후 하이젠베르크가 보낸 여생은 물리학자로서 꽤 이상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 69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서독의 권위 있는 연구기관인 막스 플랑크 연구소(Max-Planck-Gesellschaft)에서 연구소장직을 맡았으니 말이다. 연구소장직에서 은퇴한 지 6년 후인 1976년, 하이젠베르크는 과학계에 남긴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뒤로하고 비로소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한다. 


노년의 하이젠베르크



오펜하이머: 최초의 원자폭탄을 만들다


 또 다른 이야기는 1939년 미국, 한 남자가 이발소의 문을 박차고 뛰어나오며 시작된다. 손에 신문을 쥐고 있는 이 남자의 이름은 루이스 월터 앨버레즈(Luis Walter Alvarez)로, UC 버클리의 물리 교수였다. 그는 신문에서 오토 한이 원자핵을 두 개로 쪼갰다는 기사를 막 본 참이었다. 그는 곧바로 UC 버클리로 달려가서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을 흥분된 목소리로 한 동료 교수에게 설명했다. 앨버레즈의 설명을 들은 교수는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했지만 깊은 생각 끝에 핵분열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납득하게 되었다. 이때 이후로 며칠 동안 핵분열에 관한 생각에만 사로잡혀있던 교수는, 불현듯 핵분열을 이용해 누군가 파멸적인 폭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 교수가 바로 6년 뒤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을 만들게 되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이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당시 오펜하이머 말고도 핵분열이 무기에 이용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과학자들은 많았다. 유대인을 탄압하던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서 탈출한 유대인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도 이들 중 하나였다. 그는 히틀러가 핵분열을 이용해서 파멸적인 무기를 만들 것이라고 호언장담했고, 같은 유대인이었던 아인슈타인과 함께 이에 대한 미국 정부의 조치를 촉구하는 내용의 아인슈타인-실라르드 편지(Einstein–Szilard letter)를 써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에게 보내게 된다. 그리고 두  달 뒤, (히틀러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지 한 달 뒤) 이 편지를 읽은 루스벨트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느낀 루스벨트는 곧바로 우라늄 자문 위원회(Advisory Committee on Uranium) 창설했고, 이곳에서 미국의 초기 핵무기 연구가 이루어지게 된다.


루스벨트에게 핵무기에 대한 조치를 촉구한 아인슈타인과 실라르드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미국 함대 기지가 있는 진주만에 대한 공습을 개시했다.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은 그 순간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미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독일, 일본과 싸워야 했다. 그런데 싸움을 시작한 미국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연합국을 일거에 섬멸할 수 있는, 핵무기였다. 그렇기에 루스벨트와 미군 수뇌부는 독일보다 빨리 핵무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1942년 중순부터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 곧 ‘핵무기 개발’이라는 이 중대한 프로젝트에는 사무실의 소재지에서 따온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총지휘관에는 MIT 출신의 공병 준장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Groves)가 임명되었다. 이렇게 프로젝트의 초석이 어느 정도 다져지자 그로브스에게 과제가 하나 떨어졌다. 바로 핵무기를 개발할 실질적인 책임자를 찾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때 그로브스의 눈에 들어온 남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다.


레슬리 그로브스(왼쪽) & 로버트 오펜하이머(오른쪽)

 오펜하이머는 1904년 미국 뉴욕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매우 수줍고 연약했으며 정신적으로 약간은 불안정했다. 성인이 된 그는 유럽에서 공부하면서 강의에 난입하고, 교수를 암살하려고 하는 등의 사고를 치기도 했다. 오펜하이머는 확실히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는 매우 뛰어난 물리학자이기도 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뒤 양자역학과 천체물리학 등 많은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마 이런 이유로 그로브스 장군의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오펜하이머의 지휘 아래 본격적인 프로젝트가 시작된 건 1943년, 핵무기의 설계와 연구를 위한 장소로 뉴멕시코주 로스 앨러모스(Los Alamos)가 선정된 이후부터였다. 프로젝트의 대부분이 로스 앨러모스에서 오펜하이머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는데, 그는 여기서도 큰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오펜하이머는 분명 이론물리학자였지만 절친이었던 어니스트 로렌스(Ernest Lawrence) 같은 실험물리학자들과도 적극적으로 공조하며 프로젝트를 원활하게 이끌어갔다. 이는 우란프로옉트를 지휘한 하이젠베르크와 상반되는 부분이다. 


로스 앨러모스 전경 (1944년)

 오펜하이머를 비롯해 닐스 보어(Niels Bohr),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 한스 베테(Hans Bethe),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 등 과학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대충 알만한, 전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모인 맨해튼 프로젝트는 점차 빠르게 진척되었다. 이들은 생산의 효율을 위해 우라늄과 플루토늄 두 종류의 원자폭탄을 만들기로 결정했으며 몇 가지 과제를 해결한 뒤 완성 직전의 단계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들이 독일과의 핵무기 개발 대결에서 아직 완전한 승리 선언을 하지 못한 1945년 5월 9일,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 선언을 하게 된다. 미국으로 하여금 핵무기를 개발하게 만든 그 원인 제공자가 망해버렸으니 이제 핵무기 개발은 끝인 걸까? 당시 유럽에서 독일과의 전쟁은 끝났지만 태평양에서 일본과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1억총옥쇄를 내세우며 미친 듯이 저항하는 일본을 항복시킬 방도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생각한 방안이 바로 원자폭탄의 투하였다. 오펜하이머의 동의 아래,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낼 원자폭탄의 투하는 그렇게 결정되었다. 

 오펜하이머는 실제로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 실험을 진행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라늄 원자폭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분량이 많았던 플루토늄 원자폭탄을 이용해서 실험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7월 16일 밤, 뉴멕시코주의 한 사막에서, 지켜보는 모두가 반신반의하는 와중에 세계 최초의 핵실험이 이루어졌다. 트리니티 실험(Trinity)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실험의 결과는 성공. 이제 남은 건 일본에 실제로 투하하는 일뿐이었다.

 1945년 8월 6일 새벽, 3대의 B-29 폭격기가 북태평양 티니안 섬에서 이륙했다. 오전 8시, 이들은 일본 히로시마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 중 에놀라 게이(Enola Gay)라고 이름 지어진 폭격기에서 폭탄 하나가 떨어졌다. 이 폭탄의 이름은 리틀 보이(Little Boy)로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우라늄 원자폭탄이었다. 인구 28만의 대도시 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 보이는 곧 연쇄반응을 일으켰고…그 뒤부터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과학자들이 예측, 계획한 일이 펼쳐졌다.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실전 투입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이날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7만 명에서 13만 5천 명가량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원자폭탄 투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3일 뒤인 8월 9일, 이번에는 일본 나가사키에 플루토늄 원자폭탄인 팻 맨(Fat Man)이 투하되었다. 나가사키에서는 6만 명에서 8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6일 뒤인 8월 15일, 결국 일본 정부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원자폭탄 투하 직후의 히로시마


 이렇게 자신이 만든 핵무기로 전쟁을 끝낸 오펜하이머는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1946년, 미국 내의 원자력 연구를 위해 미국 원자력 위원회(Atomic Energy Commission, AEC)가 창설되자 오펜하이머는 자문위원회(General Advisory Committee)의 의장이 되어서 핵무기 개발에 계속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맨해튼 프로젝트를 거치면서 젊은 시절의 철없던 모습에서 탈피하고 큰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던 그는, 자신이 만든 원자폭탄에 대해 그 누구보다 큰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만든 모든 권한을 동원하여 원자폭탄보다 강한 수소폭탄의 개발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소폭탄은 결국 만들어졌고, 수소폭탄의 개발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오펜하이머는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이와 더불어 그가 과거에 공산당에 우호적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소련의 간첩 혐의를 받기도 했다.) 1953년, 결국 그는 원자력위원회에서 축출당한다. 이후 그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y, IAS)의 소장으로서 다양한 연구를 지속했으며, 핵무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1967년, 오펜하이머는 후두암으로 인해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한다. 최초의 원자폭탄 개발이라는 매우 큰 족적을 남겼지만, 그에 상응하는 우수를 짊어져야 했던 그는 원자폭탄 개발이 성공한 순간을 회상하며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노년의 오펜하이머



쿠르차토프: 소련 원자폭탄의 아버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펼쳐졌던 미국과 독일의 핵무기 개발 대결. 그런데 사실 이 대결에 몰래 참여했던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는 바로 소련이었다.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은, 1922년 건국된 이후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세력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불신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과 싸우던 미국과 손을 잡았을 때도 말이다. 그런데 이때, 당시 소련의 지도자이자 세계 최악의 독재자라고도 불리는 이오시프 스탈린(Иосиф Сталин)은 미국과 독일이 원자폭탄 개발 대결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잠재적 적국으로 여겨지던 미국 혹은 진짜 적국인 독일이 핵무기를 만들어낸다니, 스탈린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련이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만들 수는 없었다. 당시 소련은 수도인 모스크바가 함락 초읽기에 들어갈 정도로 국가의 존폐 위기에 처해있던 상황이어서 도저히 핵무기를 개발할 여건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탈린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낸다. 그 아이디어라 함은, 간첩들을 이용해 동맹국인 미국의 아이디어를 훔쳐 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괴도 ‘아르센 뤼팽’에 비견될만한 세기의 도둑질이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소련

 

핵개발을 지시한 이오시프 스탈린

                                     

 당시 미국에는 소련에서 파견한 간첩이 정말 많았다. 그러나 미국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의 보안이 너무 철저한 나머지 간첩들로 하여금 핵무기 개발 정보를 빼내오게 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모든 상황은 1943년,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한 남자로 인해 반전된다. 독일 출신의 영국인 물리학자였던 그의 이름은 클라우스 푹스(Klaus Fuchs). 푹스는 영국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함에 따라 로스 앨러모스로 이주하여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때 원자폭탄 설계에 지대한 공을 세워 프로젝트 내부에서도 인정받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런데 그는 사실 소련의 간첩이었다. 프로젝트가 진척될 때마다 그는 주요 기밀 정보를 남몰래 소련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1945년 트리니티 실험이 이루어질 무렵, 푹스는 플루토늄 원자폭탄의 설계도 전면을 소련에 넘겼다.


클라우스 푹스

 한편, 소련에서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맡은 사람은 이고리 쿠르차토프(Игорь Курчатов)라고 하는 물리학자였다. 1939년 핵분열 이론이 발표되자 그는 오펜하이머, 하이젠베르크와 마찬가지로 핵분열을 이용한 무기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부터 그는 소련 정부의 지원을 받고 핵무기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는데, 그의 연구는 1941년 소련이 독일에 의해 대대적으로 침공당함과 동시에 종말을 고했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소련은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은 상태였다. 하루에 병사가 수만 명씩 죽어나갔고, 수도는 함락되기 직전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쿠르차토프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핵무기 개발에 관련된 대부분의 임무는 간첩들의 손에 맡겨졌다.


이고르 쿠르차토프

 쿠르차토프의 활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45년 8월부터였다. 8월 6일과 9일, 맨해튼 프로젝트의 산물인 리틀 보이와 팻 맨이 일본에 투하되자 스탈린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었다. 마침 독일과의 전쟁도 끝난 상황이어서 스탈린은 핵무기 개발을 가속시킬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이때 소련의 악명 높은 비밀경찰인 내무인민위원회(Народный комиссариат внутренних дел СССР)의 수장인 라브렌티 베리야(Лаврентий Берия)가 지휘하는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에서 쿠르차토프는 개발 총책임자였다. 이후 베리야의 끊임없는 압박 속에서 쿠르차토프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는 1946년 우라늄 연쇄반응 실험을 처음으로 성공시켰고, 1948년 플루토늄 생산 원자로가 개발되자 원자폭탄 개발에 매우 가까워지게 되었다. 1949년 8월 29일 아침, 세미팔라틴스크(Семипалатинск)의 초원에서, RDS-1이라는 이름을 가진 플루토늄 원자폭탄을 이용한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실시되었다. 실험이 실패하면  베리야에 의해 처형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쿠르차토프의 안색은 실험 시작과 동시에 밝아졌다. 실험이 완벽하게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련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


RDS-1

 이후에도 수소폭탄을 포함한 다양한 핵무기 연구, 실험에 참여한 쿠르차토프는 핵무기의 파괴성을 여과 없이 목도했다. 때문에 그는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리고, 평화적 사용을 정부에 요구하며 여생을 보내게 된다. 수소폭탄의 위협이 전 세계를 긴장시키고 있었던 1958년, 쿠르차토프는 소련 최고회의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수소 원자력 에너지를 파괴적인 무기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삶에 번영과 즐거움을 주는 활기찬 에너지원으로 바꿀 것을 전 세계의 과학자들에게 호소한다.” ‘소련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별칭으로 불렸으나 동시에 평화에 대해 이야기했던 쿠르차토프. 그는 1960년 57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다.



텔러: 수소폭탄을 만든 매드 사이언티스트

 한때 둘도 없는 동지처럼 보였던 미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세계를 양분하는 라이벌로 변모했다. 이른바 냉전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이때까지만 해도 많은 미국인들은 미국이 소련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소련에는 없었던 핵무기가 미국에는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의 예상보다 훨씬 빠른 1949년, 소련은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며 자국의 자랑스러운 핵무기를 전 세계에 알리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은 미국 전역을 공포와 불안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은 이에 대한 조치를 당장 취해야 했다. 1950년 1월 31일, 트루먼은 “수소폭탄의 개발을 시작했다”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기인 수소폭탄의 개발은 그렇게 시작됐다.


수소폭탄 개발에 대해 발표하는 트루먼 대통령

 핵무기의 일종인 수소폭탄은 ‘핵분열’을 이용하는 원자폭탄과 달리 ‘핵융합’을 이용하는 폭탄이다. 우라늄과 같은 원소들이 분열할 때 강한 결합에너지를 발생시키는 반면, 수소는 융합할 때 강한 결합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이런 성질을 가진 수소들에 한 번에 고열을 가하게 되면 동시에 핵융합반응을 일으키며 큰 에너지를 방출하는데, 이런 현상을 이용하여 만든 폭탄이 바로 수소폭탄인 것이다. 수소폭탄이 처음 고안된 것은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라고 하는 물리학자에 의해서였다.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위해 로스 앨러모스에 과학자들이 한데 모였을 때도 한켠에서 미친 듯이 수소폭탄에 대한 연구만 하던 텔러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자 본격적으로 ‘원자폭탄보다 파괴력이 42배나 강한’ 수소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며 여기저기 목소리를 내고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은 1950년부터, 텔러는 수소폭탄을 만들며 세계의 역사를 바꾸게 된다.


에드워드 텔러(청년기)

 텔러가 미친 사람처럼 수소폭탄에 집착한 것은 그의 인생사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텔러는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18세가 된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혼란해진 헝가리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다. 이때 토지개혁을 포함한 일련의 과격한 정책으로 헝가리의 부유층이 큰 탄압을 받았고, 텔러의 가족 또한 적잖은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헝가리에서 계속 독재 정권이 유지되자 텔러는 독일로 넘어가 닐스 보어, 하이젠베르크 같은 물리학계의 전설들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미래가 창창해 보였던 텔러에게 하나의 시련이 닥치게 되니, 이는 바로 히틀러의 집권이었다. 1933년, 독일의 총통이 된 히틀러는 강력한 반(反) 유대인 정책을 펼쳤고, 이를 견디다 못한 텔러는 결국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는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모두 혐오하게 되었으며 이들을 막기 위해선 강한 무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943년, 그는 맨해튼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던 로스 앨러모스에서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그는 원자폭탄에는 시큰둥했다. 원자폭탄보다 훨씬 강한 수소폭탄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로스 앨러모스의 과학자 대다수는 딴짓만 하는 텔러를 못마땅히 여겼지만 총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의 허락하에 텔러는 따로 수소폭탄 연구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펼쳐진 이야기는 상술한 내용과 같다. 전쟁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었으며,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수소폭탄 개발을 승인한다. 


에드워드 텔러 (중년기)

 그런데 본격적인 수소폭탄 개발에 착수한 텔러는 한 가지 큰 문제를 발견한다. 수소폭탄 내부에서 수소의 핵융합을 발생시키기 위해선 고온의 열을 순식간에 가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텔러의 기존 설계가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큰 고민에 빠진 텔러에게 스타니스와프 울람(Stanisław Ulam)이라는 수학자가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그의 도움을 받아, 텔러는 1951년 텔러-울람 설계(Teller–Ulam design)를 발표한다. 텔러-울람 설계는 기본적으로 ‘핵융합에 필요한 고온이 열을 내기 위해 원자폭탄을 기폭제로 이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즉, 수소폭탄이 터지기 전 수소폭탄 내부의 원자폭탄이 먼저 터지고 여기서 나온 에너지로 핵융합을 일으켜서 수소폭탄을 작동시킨다는 것이다.

 텔러-울람 설계는 수소폭탄의 개발을 가속화시켰다.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된 지 3년도 되지 않은 1952년 11월 1일, 미국은 아이비 마이크(Ivy Mike)라는 이름의 수소폭탄을 태평양의 에네웨타크 환초(Enewetak Atoll)에 투하한다. 오퍼레이션 아이비(Operation Ivy)라고 이름 붙여진 이 실험은, 세계 최초의 수소폭탄의 탄생을 의미했다. 이때 발생한 폭발 규모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였다. 7년 전 이루어진 트리니티 실험보다 500배나 강력했으니 말이다. 



오퍼레이션 아이비

 

 그러나 이렇게 세계 최강의 무기를 다시금 유일하게 보유하게 된 미국에는 안 좋은 소식이 하나 기다리고 있었다. 1년도 되지 않아서 소련이 수소폭탄을 개발해 버린 것이었다. 1953년 8월 12일, 쿠르차토프의 동료이기도 했던 소련의 핵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Андре́й Са́харов)가 개발한 수소폭탄이 중앙아시아 사막에 투하되었다. 미국의 수소폭탄보다 강력했고, 심지어 제조과정도 더 편한 수소폭탄을 소련이 기어코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양국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가운데, 1954년 3월 1일 미국은 비키니 환초(Bikini Atoll)에 또 한 번 수소폭탄을 투하했다. 캐슬 브라보(Castle Bravo)라고 이름 지어진,  또 다른 수소폭탄 실험이었다. 이 실험의 결과는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에 750배에 달하는 규모의 폭발이 발생했으며, 이는 140km 밖에 있는 어부들을 죽이기도 했다.




캐슬 브라보

 수소폭탄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낸 텔러는 이후에도 핵물리학자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1952년 미국의 주요 핵무기 연구소 중 하나인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Lawrence Livermore National Laboratory) 창설에 큰 역할을 한 그는 이후 그곳에서 수소폭탄 연구에 전념했다. 또한 그는 UC 버클리에서 물리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시기 텔러는 핵사용을 옹호하고 이 과정에서 동료까지 궁지로 몰아넣으며 ‘매드 사이언티스트’적인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1954년, 그는 자신의 수소폭탄 개발에 대해 반대했던 오펜하이머의 청문회에 참석하여 ‘오펜하이머가 수소폭탄 개발에 큰 방해가 됐다’라고 증언했던 것이다. (이후 궁지에 몰린 오펜하이머는 결국 과학 관련 모든 직책에서 축출되었다.) 이로 인해 텔러는 맨해튼 계획에 함께 참여했던 과학자들에게 동료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큰 비판을 받았으며 과학계의 왕따로 전락하기까지 했다. 또한 1963년에는 ‘핵실험 금지 조약’에 대해 ‘핵실험에 대한 규제 따위는 필요 없다’라고 주장하며 세간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오펜하이머, 쿠르차토프와는 달리 자신이 만든 핵을 너무나도 사랑했고, 때문에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모델이 되기도 한 에드워드 텔러. 그는 이후 2003년 9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가 보인 행보는 분명 비윤리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굴곡진 인생사와 과학계에 남긴 족적을 고려했을 때, 단순히 ‘미친 과학자’라는 혹평은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닐까.



에드워드 텔러 (노년기)

자료출처


핵의 세계사(정욱식 저)

원자폭탄 -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비밀 프로젝트(스티브 셰인킨 저)

heritage daily - uranprojekt

britannica - Werner Heisenberg

britannica - J. Robert Oppenheimer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 J. Robert Oppenheimer

britannica - Manhattan Project

scientific american - Manhattan Project

Научная Россия - ИГОРЬ ВАСИЛЬЕВИЧ КУРЧАТОВ: ТИТАН АТОМНОГО ВЕКА. «В МИРЕ НАУКИ»  Информация взята с портала

РИА Новости - Биография Игоря Курчатова

britannica - Edward Teller

britannica - thermonuclear bo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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