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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파이 Jun 19. 2024

다양성이 인정되는 공간을 위하여

이주미

 6월은 프라이드먼스(Pride Month)이다. 프라이드먼스는 1969년 6월 미국 스톤월 주점에서 경찰에 맞서 성소수자 시위가 일어난 것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스톤월 항쟁 1년 후, 성평등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프라이드 퍼레이드’를 시작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이어져오고 있다. 특히, 전 세계 곳곳에서는 6월이 되면 퀴어축제 혹은 퀴어퍼레이드를 열고 있다.


 지난 6월 1일, 우리나라에서도 퀴어축제가 열렸다. 서울시는 서울 광장에서 퀴어축제가 열리는 것을 불허했다. 당시 시민위의 일부 위원이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담긴 발언을 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결국, 2024 퀴어축제는 을지로 입구역, 종각역 사이에서 개최되었다.


 이런 반대와 혐오세력에도 불구하고, 이번 퀴어축제에는 주최 측 추산 15만 명이 참여했다. 공적인 차별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사회의 흐름은 계속되고 있다. 퀴어축제엔 60개 정도의 부스가 있었고, 개인 모임부터 종교, 대사관, 동아리, 상담기관 등 다양한 단위가 참여했다. 그중에서는 장애운동 단체도 있었다. 권리중심노동자해고철회및원직복직대책위원회 X 노들장애인야학 X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X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협력한 부스였다.


 장애인권운동단체가 왜 퀴어축제에 참가했을까? 성폭력상담기관, 퀴어 관련 모임 등과 달리 퀴어 축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지 않는가? 


 장애인과 퀴어의 공통점은 ‘소수’라는 것이다. 소수로서 차별받고, 억압당한 경험을 공유한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 두 집단은 연대하고 있으며, 서로를 위해 같이 싸우고 있다. 그게 장애인권운동단체가 퀴어 축제에 참여한 이유이다. 이미 겪어보았기 때문에, 세상을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목표가 같다. 


 퀴어축제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도 참여할 수 있도록 넓은 곳에서 진행되었고, 휠체어를 타신 분들은 행진 역시 참여하셨다.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수많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각자는 환호했다. 다양성이 인정받는 공간에서 그들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늘 아래 같은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다르고, 각자의 특성과 소수성이 있다. 모두는 소수자가 될 수도 있고, 다수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린 누굴 차별하고 혐오할 권리가 없다. 대체 무슨 권리로, 무슨 이유로 남의 정체성을 함부로 부정하고 억압하는가? (너.. 뭐 돼?) 장애도, 성적 지향성, 성별 정체성도 극복하거나 치료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그대로 그들의 정체성이고, 우린 그 정체성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럼 이렇게 다양성이 포용되는 공간을 위해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의 입장에서 어떤 일을 바라보게 되면, 전혀 몰랐던 일들을 접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우학교는 신체적 장애인에게 매우 불리한 곳이다. 산속에 있는 데다가, 바닥도 돌 혹은 나무인 경우가 많아 매끄러운 공간의 거의 없어 휠체어가 다니기 힘들다. 건물도 많고 층도 많아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데, 고등학교 2, 3학년은 대부분이 이동수업이다. 고등학교동이나 본관의 복도는 사람 두 명만 서있어도 막힐 정도로 매우 좁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공간조차도 여유롭지 않다. 이는 내가 신체적으로 불리할 때, 혹은 불리한 남의 입장에서 봤을 때야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처럼 나의 시각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생각하다 보면 사회가 어떤 사람들을 기준으로 설계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걸 인식하고, 하나씩 바꿔나가다 보면 우리가 이상적으로 꿈꾸는 공간에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소수가 소수를 구한다. 권리를 가장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까지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향해 나아갔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을 위한다는 건 결국 모두를 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적 약자를 바라봐야 한다. 특히 장애인 이동권과 관련된 건 지금의 우리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그들이 겪는 일은 결코 그들의 일만이 아님을 인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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