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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파이 Jul 30. 2024

헤즈볼라: 광기와 폭주의 40년

김가빈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그로부터 약 9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전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이슬람 무장단체 헤즈볼라가 참전하며 전쟁의 양상이 한층 격해졌다.

 ‘신의 당’이라는 이름의 헤즈볼라(حزب الله)는 레바논의 시아파 이슬람 무장단체이자 정당으로, 현재 레바논의 집권 여당이다. 헤즈볼라는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인 1982년 설립된 이래(공식 설립 연도는 1985년) 현재까지 활발히 활동하며 아랍 정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이번 기사에서는 헤즈볼라와 그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다.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이 혁명을 일으켜 세속주의 왕정을 폐지하고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한다. 그리고 곧 이 사건은 아랍 전체에 거대한 파동을 일으키게 되는데, 곳곳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란혁명 (1979)

  지중해 동쪽 연안, 시리아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 접하고 있는 작은 나라 레바논은 당시 치열한 내전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1976년 기독교 세력과 팔레스타인의 PLO 사이의 내전이 처음 발발했으며, 이후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1982년, 레바논에 주둔 중인 PLO의 소탕을 명분으로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하였고, 남부 지방의 상당수를 점령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에 대해 레바논의 수많은 무슬림들은 분개했다. 이때 상술한 이란 혁명의 성공과 맞물려 무슬림들의 ‘혁명 의식’이 점차 강렬해지기 시작한다. 

레바논을 침공한 이스라엘군

 그렇게 1982년 여름, 고즈넉한 정경을 자랑하는 베카 계곡에서 이슬람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가 탄생했다. 1000명가량의 전투원과 이란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이 그 기반이었다.


 헤즈볼라의 폭주는 곧바로 시작되었다. 1983년 4월 18일, 레바논 내전에 미군이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베이루트 미국 대사관에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했던 것이다. 이 테러로 인해 미국인 17명을 포함해 63명이 사망했다. 

베이루트 미국 대사관 테러 (1983)

 이 사건은 서방세계가 받게 될 충격과 공포의 서막이었다. 베이루트 미국 대사관 테러로부터 반년 후인 1983년 10월 23일, 헤즈볼라는 미군과 프랑스군 주둔지에 다시금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한다. 

베이루트 막사 테러 (1983)

 이 테러는 241명의 미군과 58명의 프랑스군을 포함해 총 307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이는  미증유의 사건이었다. 미국 전역이 충격에 빠졌으며, 결국 미군은 레바논에서 철수하게 된다.


 미군은 철수했으나, 모든 미국인들이 레바논에서 떠나는 것을 원했던 헤즈볼라는 만족하지 않았다. 1984년 9월 20일, 헤즈볼라는 베이루트 미국 대사관 별관에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한다. 이 사건은 두 명의 미국인을 포함한 23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베이루트 미국 대사관 테러 (1984)

 이러한 일련의 테러들은 헤즈볼라의 명성을 드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수많은 극단적 이슬람주의자들이 열광하기 시작했고, 인기를 등에 업은 헤즈볼라는 1992년에 치러진 레바논 총선거에 출마해 총 8석을 얻게 된다.


 정계에서 공식적으로 활발히 활동을 이어가는 한편, 헤즈볼라는 동시에 레바논 남부를 점령 중이었던 이스라엘군에 대한 게릴라전, 그리고 테러를 지속했다. 


 1992년 3월 17일, 헤즈볼라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스라엘 대사관에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했으며, 이로 인해 29명이 사망했다. 이후 이들은 1994년 7월 18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유대인 커뮤니티 센터인 AMIA 빌딩에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 86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으며, 그로부터 8일 뒤인 1994년 7월 26일에는 영국 런던 이스라엘 대사관에 테러를 감행한다. 

AMIA 빌딩 테러 (1994)

 2000년 7월, 이스라엘군이 레바논에서 철수한다. 그러나 헤즈볼라는 여전히 이스라엘에 적대적이었으며, 국경지역에서 헤즈볼라와 이스라엘군 사이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2006년 7월 12일, 헤즈볼라의 공격으로 이스라엘군 3명이 사망하고 2명이 피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이스라엘은 전쟁을 천명했으며, 대대적인 공습과 동시에 1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레바논을 침공한다. 

이스라엘군의 공습을 받은 베이루트 시가지

 이 전쟁에서 헤즈볼라는 예상외로 선전하며 이스라엘군을 막아냈다. 유의미한 결과를 얻지 못한 이스라엘군은 2006년 8월 14일 헤즈볼라 측과 휴전한 뒤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전쟁을 사실상의 승리로 이끈 헤즈볼라는 많은 사람들에게 ‘외세를 막아낸 영웅’으로 칭송받기 시작했으며, 강화된 입지를 바탕으로는 내각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레바논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세력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된다.

베이루트에서 열린 헤즈볼라 지지 시위

 2011년 3월 15일, 바샤르 알아사드 정부와 반군 사이에서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자 헤즈볼라는 같은 시아파이자 그동안 본인들의 든든한 뒷배 역할을 해 왔었던 알아사드 정부를 지지하며 전쟁에 참전했다. 이에 헤즈볼라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스라엘 또한 전쟁에 참전했으며, 헤즈볼라와 이스라엘군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시리아 땅에서 펼쳐졌다.

시리아 내전에 참전한 헤즈볼라군

 2018년, 총선거에서 헤즈볼라가 포함된 3월 8일 연맹이 승리를 거두며 헤즈볼라는 집권 여당으로 부상하였다. 비로소 레바논 정치의 중심이 된 것이다. 이후 2022년, 경제 침체와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고의 여파로 인해 하락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총선거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얻으며 헤즈볼라계는 집권을 유지하게 된다.

헤즈볼라의 선거 승리 축하 퍼레이드

 레바논 내전부터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이르기까지, 42년간 헤즈볼라는 크고 작은 분쟁에 개입하며 힘을 키워왔다. 그 결과 오늘날 헤즈볼라는 레바논 최대의 정치세력이자 무장단체로 거듭났다. 이스라엘과의 갈등이 절정으로 향하는 지금, 헤즈볼라의 향방은 더욱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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