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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파이 Jun 05. 2020

세월호와 주체성

[열며]

세월호 사건 이후 청소년인 우리는 무엇을 마주했는가.

고2의 이종빈 학생은 “세월호 사건 이후 <부끄럽다>,<잊지 않겠다>라는 말들이 많이 들려온다. 하지만 우리의 또래 학생들에게는 그러한 말들을 넘어 <가만히 있으라>는 언어가 더 와닿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 아래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려야만 했던 우리의 또래를 마주한 순간, 그곳에는 단원고 학생들뿐만 아닌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인 우리 모두가 자리하고 있었다. 세월호는 우리에게 <그 배에 내가 타고 있었다면 나는 과연 가만히 있지 않을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남겼다. 그 질문에 답 하듯이 곳곳에서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외침이 들려온다.


세월호 이후의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것은, 나의 생각과 나의 철학을 바탕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부정의와 불의한 상황을 자신이 옳다고 믿는 상황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더 이상 수동적인 타자가 아닌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고 사회에서 하나의 주체로서 자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명확하게 되짚어보아야 할 것은 우리의 <가만히 있지 않음>은 그저 사회적으로 대두되는 불의한 상황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구체적인 모습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세월호 이후 주체적 삶의 시작은 우리의 삶에 대한 반성과 점검에서 시작되어야 하기에 세월호 3주기가 돌아온 지금, 세월호 이후 삶의 주체성에 관해 점검해야 할 때이다.  



[이야기 하나]

그렇다면 세월호 이후 세월호와 관련된 논의들과 활동들이 활발하였던 이우학교의 경우는 어떨까. 이우학교 학생들의 삶의 주체성에 대한 조사를 위해 5월 6일부터 교내 학생들을 대상으로 세월호와 삶의 주체성에 관한 설문조사를 진행하였다. 설문조사는 자신이 이우학교 내에서 주체라고 느껴지는 수업 과목들과 수업 방식, 수업 외의 활동 중 주체라고 느껴지는 활동들과 그 이유를 묻는 설문이었다.


먼저 수업의 주체에 관한 답변부터 살펴보면 설문에 참여한 14명의 학생들 중 다수의 학생들은 “사회과목과 문학 수업이 주체적이라고 느껴진다.”고 답변했다. “안건도 우리 안의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의 생각을 편히 공유할 수 있다.”, “내가 바꾸고 싶어 하는 문제에 대해서 알아보고 찾아가는 시간이 많다.” 등의 이유였다. 또한 주체적으로 수업에 참여한다고 생각하였던 수업의 내용들로는 “모두에게 제공되는 지식이나 정보를 자신의 삶과 연결 짓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 가장 중요할 것 같다. 어떤 내용이라고 특정하긴 힘들지만 내가 하는 고민, 생각들과 잘 연결되었던 수업의 내용.”, “현재의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사회 전반적 구조의 문제까지 대두될 수 있는 일들을 다룬 설명을 쌤이 해주실 때.”, “우리 안의 문제나 우리가 문제라 여기는 이야기들을 이야기할 때.”라고 답하였다.


많은 학생들은 수업 안에서 삶을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주체적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수업 안에서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수업안의 이야기들이 내 삶의 고민들로 이어지며 내가 속해있는 사회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 볼 수 있게 되고 그것을 통해 사회에 관한 나의 시선이 확장되는 것이다. 


우리는 삶을 이야기 할 때 결코 자신이 속한 사회와 분리하여 이야기할 수 없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상황들과 사건들이 결코 특정한 누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는 까닭이다. 사회 과목의 경우 다양한 사회 문제들이 곧 수업의 내용이기에 수업의 주체라고 느낄 수 있다. 세월호 이후의 '주체'의 맥락 또한 이와 같다. 끊임없이 나의 삶과 배움을 잇고 고민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수업이 이러한 고민들을 더 다양하게 바라보게 하는 역할을 수행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월호 이후 수업이 변화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나 국어 과목들에 비해 대체로 삶과 사회에 대한 고민과의 접점이 적은 수학과 같은 과목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과목 특성상 이를 연결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는 수업의 주체성을 오직 <삶과 배움이 함께 일어날 때>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는 것 또한 필요하다. 설문 응답자 중에는 “수업에서 내몰리지 않으며, 스스로를 수업에서 배제시켜도 되는 수업이 아니라 물음과 답이 오가며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수업에서 주체라고 느껴진다.”고 답변한 이도 있다. 이는 수업을 넘어 수업과 수업 밖을 연결 짓기 이전에 수업 자체에서의 주체를 고민해보게 하는 답변이다.


수업의 주체가 되는 과정의 첫 번째는 먼저 수업의 주체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것 또한 삶과 학교라는 사회에서 우리 스스로가 주체가 되는 길이 아닐까.  



[이야기 둘]

두 번째로 다룰 부분은 ‘수업 외 활동에서 나타나는 주체성’에 관해 진행한 설문 결과이다. 질문은 ‘수업 외의 활동에서 삶의 주체가 되었다고 생각되는 활동이 무엇인가요?’였고 총 28개의 응답이 기록되었다. 결과를 보면, 소모임에서 삶의 주체가 되었다고 느낀 학생이 가장 많았으며, 그 수치는 총학과 학년회를 고른 학생들을 합친 수보다 많았다. (소모임-8표 , 총학생회+학년학생회-5표) 이 결과는 필자들의 당초 생각과 빗나갔기 때문에도 눈여겨 볼만 하지만, 더 들어가 보면 꽤나 묵직한 화두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소모임보다 총학과 학년회가 낮게 나온 원인을 분석하기 전에 양자 간의 차이에 대해 정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차이가 곧바로 그 원인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 테지만 해석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도구로서 그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구성원의 차이이다. 소모임을 ‘개인의 취향과 기호를 공유할 수 있는 여러 개인과 함께하는 자리’라고 하면, 총학생회와 학년회는 ‘다양한 성향의 개인이 모이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가정한다면 당연하게도 소모임에서 자신의 생각과 목표대로 활동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두 번째는 피로도의 차이이다. 소모임에 비하여 총학과 학년회는 여러 의견이 상충하는 자리이기에 상대적으로 피로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인원수의 차이이다. 소모임은 대체로 ‘소(小)모임’이라는 이름 그대로 많은 인원으로 구성되는 일이 드물다. 반면 학년 학생회는 10명의 구성원, 총학생회는 20명을 상회하는 구성원을 가진다.


마지막으로 짚어볼 차이는, 가장 중요시할 수 있을, ‘생각의 출발점’이다. 으레 소모임에서 하는 활동은 제 삶에서 축적된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 출발점이 전적으로 나의 삶에서 나아가는 것이다. 한편 출발점이 공공의 삶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에 해당하는 모임이 학생회이다. 공공의 삶을 내 삶에 빗대어 말하는 일이 소모임의 그것과 상반되는 지점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실제 삶의 주체로 느껴지는 데에 어떤 요소가 작동하는지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현재 학생들에게는 ‘나의 생각대로 활동이 원활히 이루어지는가?’라는 질문이 삶의 주체가 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작동되고 있다는 것. 이는 ‘지금까지 구성된 주체가 흔들리지 않고 강화되고 있는가?’로 바꿔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주체성을 가진다는 말은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킬 수 있는 요건>을 만들어나가는 것과 전혀 다르다. 자신의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 공공의 고민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오는 작업인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볼 지점은, 이런 “주체성이란 개인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과정에만 놓인 것이 아닌, 사회와 부대끼며 나의 위치를 만들어가는 과정 아닌가?”와 같은 주장을 학생들에게 물었을 때 대부분이 공감할 거란 사실이다. 무인도에 있는 개인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 주체적인 삶이 아니라고 쉽게 공감하는 것처럼 말이다. 총학과 학년회가 학생의 주체성 향상에 도움을 준다고 얘기하는 것 또한 이런 요건을 잘 만족하고 있기 때문 아니던가. 


그러므로 우리는 학생들이 느끼는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한 요건>과 <실제로 작동하는 요건>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말과 행동이 다른 경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학생들의 이중 잣대라는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은 곤란하다. 행동은 말의 지속적인 성숙으로 빚어지는 결과인 경우가 있고, 이런 경우를 고려해서 볼 때 현재 학생들은 성숙해나가는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언어를 만드는 일은 지난한 과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를 비롯한 학생들은 모두 <말로 이해하는 것>과 <실제 삶에서 중요히 다뤄지는 부분>의 괴리를 안고 갈 수밖에 없다. 양자가 같아지기 위해서는 과정의 지속, 즉 <지속적인 인식의 재생산>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말로써 이해되는 것>과 <행동으로써 이해되는 것>으로의 이행에 학교가 (여기서 학교는 각종 자치회를 포함한 학교 주체 전부이다) 끊임없는 마중물을 긷기를 기대한다. 

*많은 표본이 모인 설문을 가지고 분석하는 기사가 아니기에 이런 주장을 내는 것이 성급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신뢰할 수 없는 조사라고 해서 그 주장이 정당한 문제제기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 반대도 포함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논의는 학생들이 삶의 주체의 정의를 세월호 사건이 우리에게 이르는 ‘가만히 있지 않을 수 있는 힘’에서 출발하여, ‘기존의 나를 굳히는 과정이 아니라 사회에서 발견되는 고민을 나의 삶으로 끌어와 특정 위치에 놓는 힘’ 이라고 이해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맺으며]

설문조사를 정리하며 든 의문 중 하나는 ‘수학과 같은 과목이 주체적인 삶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에 대한 것이었다. 앞서 주체적인 수업에 대해 열린 결말을 제시했지만 다른 전개도 있을 수 있음을 얘기하기 위해 첨언한다. 수업과 수업은 45분의 크기를 가진다고 등치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다. 필자는 이른바 ‘수학수업’을 ‘사회수업’, ‘국어수업’과 같은 수업으로 생각하는 한 돌파구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바라본다. 왜냐하면 수학이라는 과목은 본디 새로운 언어의 학문이고 그 언어로 사유하는 학문이 바로 과학이기 때문이다. 사회나 역사와 같은 과목을 더 주체적으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철학이라는 언어를 익혀야 하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그러므로 수학에게 사회수업과 같은 감흥이 없다고 머리를 싸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애초에 둘은 우리에게 놓여있는 지점이 다르므로. 


한편 <삶의 주체> 가 되는 데에 있어 극복해야 할 지점 모두 학교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이우고등학교는 학생들의 낮은 자존감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중이다. 낮은 자존감은 [이야기 둘]에서 설명했던 ‘지난한 과정’을 해보기도 전에 포기하는 사태를 만들 수 있는 암초라고 보아야 한다. 또한 배움에서의 허무 또한 그 위험요소이다. 배움을 위한 배움, 그러니까 새로운 지식을 쌓을 때의 쾌감을 위한 배움의 종착역은 결국 그것을 쌓은 만큼의 허무감일 것이다. 


세월호 사건 이후,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어느 길로 나아가고 있을까. 또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다시 수업을 들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글을 종합하여 볼 때 하나의 비유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월호 계기수업은 끝났지만, 끝나지 않았다.

우리에게 놓여진 모든 수업은 결국, ‘너의 삶’에 대한 계기수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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