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ke; 역설과 모순의 모자이크

재해석된 예술 - <조커> / 장한

by 와이파이



조커는 2019년에 나온 영화 중에 논란성 하나만큼은 이견 없는 절대적 1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평론가들조차도 두 의견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자신의 생각을 서술해갔고, 이후 이 영화를 접하게 된 대중들 역시 두 의견으로 나뉘어 영화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구체화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조커는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의 예술 작품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준 하나의 사건(Event)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사건(Event)은 필자에게 우리가 지난 세월 동안 우리의 곁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회 비판적 예술들과 개인이나 집단의 삶을 망치는 폭력적 예술들을 너무나 쉽게 받아들인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이 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독자들이 영화를 조금 더 쉽게, 그리고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독자들과 같은 비전문가인 필자가 분석한 점을 써보려고 한다. 사견은 최대한 배제하려 노력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독자께서는 마음 놓고 자신의 자유로운 가치판단을 즐기시기를 바란다.



1. 몰입의 모순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조커에 몰입하게 된다. 너무나 불행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꿈을 가지고 아등바등 하루를 사는 조커의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너무나 흔한 일반민들의 생활로 느껴진다. 하지만 영화는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우리의 이러한 몰입을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바꿔버린다. 어떤 사람은 감정은 조커를 따라가지만, 이성이 이러한 사고를 방해하는, 감정과 이성의 분리를 경험하기도 했고, 또 다른 사람은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조커와 시위대를 보며 영화가 시사하는 현실과 자신의 현실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이러한 점들을 몰입의 모순이라고 이름 붙였다. 영화가 주인공에게 몰입하도록 마련한 장치들을, 시간이 진행될수록 주인공이 스스로 걷어차 버리는 모습에 대한 작명이다.


앞서 말했듯이 조커의 배경은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이 영화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러한 점조차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마다 몰입할 수 있는 지점이 다르겠지만, 보면서 이 영화는 모두에게 하나쯤은 몰입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너무나 비참한 인생 가운데서도 애써 웃으며 자신의 꿈과 내일을 소망하는 사람의 모습은 필자에게 어느 정도는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이러한 연민과 인류애를 조커는 무시하듯, 이 이야기를 관객이 원하는 방향으로 절대 흐르게 하지 않는다.


이러한 몰입의 모순은 마치 ‘불쾌한 골짜기’를 연상케 한다. 불쾌한 골짜기는 로봇 공학의 발달로 제시된 개념이다. 어떤 대상이 인간과 점점 비슷해지면 그 대상에 대한 인간의 호감도도 점점 올라가지만, 어느 정도의 비슷한 수준 이상이 되었을 때는 인간과의 공통점보다 괴리감이 더 눈에 띄게 되어서 대상에 대한 불쾌감이 호감을 앞지르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연구적 사실이 예술가들에게는 영감이 되어 익숙함 속의 불편함, 괴리감, 두려움이라는 하나의 예술적 패러다임을 만들었는데, 필자는 이 영화가 이 모습을 잘 표현한다고 느꼈다. 너무나 익숙한 서사 전개로 모두가 공감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비정상적인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서 공감되지 못하게 만드는 모습과, 붕 뜬다거나 괴리감이 든다거나 하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관객에게 불러일으키는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결국 이러한 모습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조커를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도달하게 만든다.



2. 진실의 모순

조커라는 스토리는 몰입의 모순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연출하여 보여주는 영화는 더욱 혼란스러운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이 모순은 관객들이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무엇을 믿고 공감해야 하고 무엇을 비판해야 하는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러한 점에서 이 모순은 몰입의 모순을 더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필자는 이 모순에게 진실의 모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화에는 우리가 철석같이 믿었던 진실을, 조커의 왜곡된 망상이라 보여주는 장치가 가득하다. 어떤 부분에서는 직접적으로 이를 드러내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의도적으로 숨김으로 조커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전자의 경우에는 조커와 조커의 옆집에 살던 소피의 관계를, 후자는 지하철 살인사건과 어머니인 페니를 살해하는 장면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를 따지는 해석은 너무나도 많다. 어떤 사람은 영화에서 보여준 거짓만이 거짓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또 다른 사람은 조커가 원래부터 살인 충동을 겪고 있었고 그것이 어느 순간 폭발했지만, 자신이 누군가를 죽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자신의 머릿속에서 정교한 망상을 만들었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또 다른 사람은 영화의 모든 내용이 ‘머레이가 쇼 진행 중 살해당했다.’라는 소식을 듣고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어낸 아서 플렉이라는 사람의 망상일 뿐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작은 의심은 믿음이라는 커다란 바위에 작은 금을 낸다. 그리고 그 커다란 바위는 손가락 한 개 정도의 작은 금으로 인해, 결국 쪼개진다. 영화는 이것을 노렸을지도 모르겠다. 몰입의 모순을 겪어내고서도 여전히 조커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이 진실의 모순을 선사하며 질문하는 것이다.


“당신이 방금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 저 이유가, 저 사연이, 저 상처가 진실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저 자기합리화일 가능성은요?”

“그럴 수 있겠네요. 그럼 조커는... 뭐죠? 우리는 그에 대해 뭘 믿고 알 수 있을까요?”

다시 영화가 답한다.

“흠, 글쎄요. 하지만 그가 웃으면서 자신 바로 앞에 있는 상담사를 죽일 만큼 미친 사람인 것은 확실하겠네요.”


3. 대상의 모순

다른 영화에서 보여지는 춤과 웃음은 밝다. 어두운 어떤 것이라도 침범할 수 없을 정도의 순수함, 그래서 그 자체로 고귀해 보인다. 하지만 조커의 춤과 웃음은 무언가 달라보인다. 그의 춤과 웃음은 내면 깊숙히 존재하는 어떠한 어두운 덩어리가 자신으로부터 싹을 틔워 불길한 꽃을 발화하듯 튀어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조커를 보고 ‘괴리감’으로 평가하지만 그 괴리감의 대상은 명확하지 않다. 이상한 조커인지, 그를 이상하게 보는 주변인들인지, 그리고 이 상황 자체에 불편함과 이상함을 느끼는 관객 자신인지 영화는 의문을 정리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이처럼 진실과 거짓을, 올바름과 그릇됨을 한데 뒤섞은 이 영화는, 최종적으로 우리가 이 평가들을 어떤 대상을 향해 사용해야 하는지조차 구분하지 못하게 만든다. 작중 조커가 상담사에게 했던 말처럼, 세상이 미친 건지 아서가 미쳐가는 건지 우리는 구분하지 못한다. 필자는 이 영화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대상의 모순’을 충분히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대상의 모순”을 충분히 느끼는 것은, 느낌이나 감정, 평가의 대상을 한 존재로 한정짓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물론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개개인의 잘못을 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으로 비슷한 문화에서, 옳고 그름을 배우며 자라왔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같은 사건을 보더라도 각각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대다수가 느끼고 공유하는 도덕적인 기준은 비슷하다. 지하철에서 여성에게 지나친 추파를 던지고 아서를 폭행했던 남성들에게 원인 제공격의 잘못이 있고, 이들을 살해한 아서에게도 마찬가지로 큰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필자는 이 판단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 영화를 볼 때는 이런 개별적 캐릭터에 대한 판단보다, 영화가 묘사하는 사회 구성원 전반에 대한 판단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한번 조커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미친 건지 자신이 미친 건지 궁금해 하는 아서에게 당신이 미친 것이라며 말하겠지만, 사실 세상이 미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조커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지만, 조커의 ‘감정’은 이해할 수 있기에, 그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행한 무관심과 무례함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남의 감정 따윈 상관하지 않는 조커와, 이러한 조커를 광적으로 섬기는 폭도들과, 이런 사회적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듯 자선행사랍시고 모여 모던 타임즈(하층민과 노동자의 삶을 다룬 찰리 채플린의 블랙 코미디)를 보는 부유층, 이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필자는 조커라는 영화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을 하기 위해 선행되는 ‘대상의 모순’을 바라볼 때, 단순한 도덕적 가치로 누가 더 잘못인가를 따지지 않고, 사회 구성원들 전체의 문제로 바라보며 자신은 어떤 계층에 대입되는지, 그리고 현실에서는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도 덧붙이고 싶다.


필자의 사견을 최대한 배제하고 싶었건만, 마지막에 와서는 이런 결심이 무색한 듯 필자의 사견이 듬뿍 들어간 것 같다. 그래서 저번 글에 이어서 또 독자들에게는 죄송한 마음이다. 사실 조커라는 영화는 필자가 작성한 단순한 서사적 관점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너무나 많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이 서두에서 밝힌 이 영화의 논란성을 한층 더 키워주기도 한다. 하지만 어떠한 예술작품을 사회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 예술작품을 작품 그 자체로 분석을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반대로, 사회적으로 올바른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를 만들었어도, 그것이 예술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아니 예술성을 가지고 있든 말든 그 올바른 메시지를 올바르게 전하고자 하는 성의조차도 감상자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술로서 자신의 말하는 바를 분명하게 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예술이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이 예술을 가지고 어떤 사회를 그릴 수 있는가, 어떤 사회가 만들어져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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