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약속 장소인 브런치 카페는 생각보다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기다리고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정장을 입은 여성이 들어왔다.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그녀는 차분하면서도 지적인 인상이었다. 나를 발견하고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빛나리님이시죠? 저는 이수현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감사해요. 혹시 뭘 드실까요?"
"저는 이미 커피를 시켰으니까 편하게 드세요."
이수현 편집부장은 간단한 샐러드와 커피를 주문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생각보다 편안한 분위기에 처음의 긴장감이 조금씩 풀렸다.
"블로그 글들을 모두 읽어봤는데요, 정말 대단하세요. 이런 어려운 상황들을 겪으시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신 게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말 제 이야기가 책이 될 수 있을까요?"
"충분히 가능해요. 아니,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요즘 많은 사람들이 우울감과 절망감에 시달리고 있잖아요. 특히 코로나 이후로 더 심해졌고요. 그런 사람들에게 빛나리님의 이야기는 정말 큰 힘이 될 거예요."
이수현 부장의 진지한 표정을 보니 이것이 단순한 사업적 제안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사실 저도 몇 년 전에 힘든 시기를 겪었어요. 그때 비슷한 경험을 한 분의 에세이를 읽고 많은 위로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이런 책들을 더 많이 세상에 내보내고 싶어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 건가요?"
"우선 빛나리님의 전체 이야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해요. 블로그에는 운동 일지 위주로 되어 있잖아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전체 스토리를 책 한 권 분량으로 구성해야 하거든요."
"그게 가능할까요? 저는 전문 작가도 아니고..."
"걱정 마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빛나리님이 경험담을 말씀해 주시면 제가 편집하고 다듬어서 책으로 만들어드리는 거죠. 물론 최종 결정권은 빛나리님께 있어요."
이수현 부장은 가방에서 두툼한 파일을 꺼냈다. 출간 계약서와 함께 세부적인 진행 계획이 적혀 있었다.
"먼저 이걸 보시고 집에서 충분히 검토해 보세요.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시고요. 급하게 결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파일을 받아 들고 넘겨보니 생각보다 자세한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인세율, 발행 부수, 마케팅 계획까지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이런 걸 미리 준비해 오셨다니..."
"사실 빛나리님 블로그를 발견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몇 달 전부터 계속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특히 바디프로필 도전기는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몇 달 전부터요?"
"네. 처음에는 단순한 운동 블로그인 줄 알았는데, 글 사이사이에 드러나는 삶에 대한 통찰과 의지가 남달랐어요. 그래서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죠."
이수현 부장의 말을 듣고 보니 조금 놀라웠다. 내가 별 생각 없이 써 내려간 글들이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니.
"사실 저는 그냥 제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서 쓴 건데..."
"그게 바로 힘이에요. 꾸며서 쓴 글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글이니까 더 감동적인 거죠."
브런치가 나오고 우리는 잠시 식사를 하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이수현 부장은 생각보다 편안하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출판업계에서 10년 넘게 일했다는 그녀의 경험담을 들으니 책 출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졌다.
"그런데 한 가지 제안이 있어요."
"어떤 제안인가요?"
"필명을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물론 본명으로 하셔도 되지만, 새로운 시작이니까 새로운 이름도 좋을 것 같아서요."
"필명이요..."
"네. 빛나리라는 닉네임도 좋지만, 좀 더 정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름이면 좋겠어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이름. 확실히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그동안 홍매화라는 이름으로 살아오면서 너무 많은 아픔을 겪었다. 이제는 정말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아이디어네요.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볼게요."
"네, 충분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이것도 보세요."
이수현 부장이 스마트폰을 꺼내서 인터넷 서점 화면을 보여줬다. 비슷한 장르의 책들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책들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책들이 요즘 많이 나오고 있어요. 하지만 빛나리님 이야기만큼 극적이고 감동적인 건 없었어요. 분명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확신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제가 이 일을 10년 넘게 해왔거든요. 어떤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어느 정도는 감이 와요. 빛나리님 이야기는 정말 특별해요."
카페에서 나올 때쯤 되자 마음이 어느 정도 정해졌다. 물론 계약서를 꼼꼼히 검토해 봐야겠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연락드릴게요. 빠른 시일 내에요."
"감사해요. 정말 기대돼요."
집에 돌아와서 이수현 부장이 준 파일을 자세히 읽어봤다. 계약 조건들도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진심으로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주는 그녀의 마음이 느껴졌다.
저녁을 먹고 나서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할머니, 저 좋은 소식이 있어요."
"무슨 소식이니?"
"제가 책을 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책을? 우리 매화가?"
"네. 제가 그동안 쓴 글들을 책으로 만들어서 출간하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전화 너머로 할머니의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할머니의 기쁜 목소리가 이어졌다.
"세상에... 우리 매화가 작가가 되는구나."
"아직 확정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정말 하고 싶어요."
"그럼 해야지. 네가 하고 싶다면 할머니는 뭐든 응원할게."
할머니의 따뜻한 응원을 받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어서 동생에게도 연락했다.
"누나, 무슨 일이야?"
"대훈아, 누나 책 낼 수도 있을 것 같아."
"책? 무슨 책?"
"내 인생 이야기를 책으로 만드는 거야."
잠시 정적이 흘렀다. 동생도 놀란 모양이었다.
"진짜로? 대박이네. 누나 대단해."
"고마워. 그런데 하나 부탁이 있어."
"뭔데?"
"이 책이 나오면 우리 가족 이야기도 나올 텐데... 괜찮을까?"
"당연히 괜찮지. 오히려 자랑스러워. 우리 누나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하고 생각할 거야."
동생의 응원까지 받으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날 밤 이수현 부장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오늘 주신 자료들을 모두 검토해 봤습니다.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언제 시작할 수 있을까요?'
이메일을 보내고 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이수현 부장에게서 답장이 왔다.
'정말 기쁩니다!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요? 그 전에 필명부터 정해봐요. 혹시 생각해 둔 게 있나요?'
필명. 밤새 생각해 봤지만 쉽게 정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빛나리에서 따온 '나리'에 내 성인 '홍'을 붙인 '홍나리'. 매화꽃 대신 나리꽃으로 새롭게 피어나는 내 인생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필명이 아니라 아예 이름을 바꾸는 건 어떨까? 개명을 하면 정말로 새로운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홍나리.
소리 내어 불러보니 마음에 들었다. 홍매화의 아픈 기억들을 뒤로하고, 홍나리로 새롭게 시작하는 거다.
그날 오후 이수현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장님, 저 결정했어요."
"어떤 결정이요?"
"이름을 아예 바꾸려고 해요. 홍나리로요."
전화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말 좋은 결정인 것 같아요. 홍나리... 아름다운 이름이네요."
"개명 절차가 끝나면 연락드릴게요."
"네, 기다릴게요. 홍나리 작가님."
전화를 끊고 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홍나리 작가. 나도 이제 작가가 되는 건가?
거울 앞에 서서 내 모습을 바라봤다. 예전의 절망에 가득 찬 홍매화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신 희망에 찬 홍나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 홍매화. 그동안 고생 많았어."
거울 속 내 모습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이제 정말로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런데 그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전남편이었다.
"여보세요?"
"매화야, 갑자기 미안한데... 아이들이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