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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야 Aug 28. 2024

어쩌면 행복

12화

설레며 잠들었던 것과 달리 알람 소리와 함께 요란하게 펄럭거리며 맞이한 아침은 정신없이 분주했다. 이 날따라 치약이며, 샴푸며 푸덕거리며 가슴 졸이게 만드는가 하면 잠들기 전에 챙겨뒀던 옷은 입다 보니 구멍이 나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출발 시간을 여유 있게 하려고 미리 맞춰둔 알람이 무색하게 예정보다 늦은 시간에 집을 나서야 했다. 머리도 미처 다 말리지 못하고 허겁지겁 신발을 꺾어 신고 나온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서둘러야 했다. 예약해 둔 샵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샵은 집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었다. 버스로 가기엔 시간을 맞추기 어려울 것 같아서 택시를 미리 불러뒀다. 예약해 둔 시간에 정확히 택시가 도착했고, 허둥대며 집을 나선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었다. 택시를 미리 불러두길 잘했다는 생각에 어깨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드라이를 하지 못한 머리가 조금 신경 쓰였지만 샵에 가면 어떻게든 되겠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금세 잊을 수 있었다. 그것보다 더 신경이 쓰였던 것은 촬영 걱정과 배고픔이었다. 수분 섭취량까지 정해진 양만 먹으며 버틴 덕에 갈증은 두 말할 것도 없고, 길거리에 보이는 식당을 볼 때마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마저도 마른침이라 잘 넘어가지도 않았다. 촬영이 끝나면 잔뜩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수첩을 꺼내서 떠오르는 대로 적다 보니 한 페이지 가득한 메뉴가 탄생했다.


샵에 도착하자 준비된 직원들이 지정된 좌석으로 안내했다. 상태를 간당하게 확인하고는 어떤 순서로 진행될지를 알려주었다. 사전에 안내받은 내용이지만 직접 들으니 '드디어!'라는 생각에 갑자기 몰아친 긴장감에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메이크업이 완성되면 의상 교체가 힘들어져서 미리 샵에 보내둔 의상을 입어야 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섰는데 그동안 공들인 근육들이 시원하게 보였다. 촬영 때 취할 포즈들을 취해보면서 민망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없는지 체크하고 고쳐 입고 나서야 탈의실을 나갔다. 머리부터 메이크업까지 사전에 약속한 콘셉트로 이쁘게 꾸미기 시작했다. 나한테 어울릴지 긴가민가 했는데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 거울 속 내 모습에 만족감이 차올라서 나도 모르게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탈의실에서 봤던 내 모습과 지금 거울 앞에 바뀌고 있는 모습이 오버렙되었는데 참 이뻤다.


어느새 준비가 모두 끝났다. 의상만 입은 채로 나갈 수 없어서 겉옷으로 감추고는 바로 근처의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스튜디오로 들어서자 역시 준비 중이던 직원들이 나와서 밝게 인사를 해주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머리가 쭈뼛 섰다. 안내를 따라 들어간 스튜디오는 촬영 스폿을 둘러싼 기둥 네 개가 천장과 지붕을 받치고 있었고, 그 끝을 보려면 고개를 바짝 들어야 할 정도로 높았다. 몇 사람이 공간을 채우기에는 한없이 부족할 텐데도 스튜디오 가득 무거운 공기가 느껴졌다. 스튜디오 한편에서 작가님과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관장님이 먼저 도착해서 작가님과 포즈에 대해서 상의를 하셨다고 했다. 내가 들고 있던 짐들을 받아 들더니 급하게 조명이 비추지 않는 어두운 곳으로 데려갔다. 손에 들고 있던 짐들을 모두 내려놓고는 나를 쳐다보곤 냅다 운동을 시켰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는 근육을 펌핑시켜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관장님은 이후에도 의상교체나 장비 교체등 틈이 날 때마다 펌핑을 도와주셨다.


촬영은 순조로웠다. 준비되었던 의상들과 사전에 협의된 포즈와 콘셉트 모두가 예정대로였다. 촬영 중간에 작가님이 촬영본을 보여주면서 모니터링을 할 때마다 긴장감은 사라지고 자신감이 넘쳤다. 촬영 중반을 넘어서자 환경에 적응한 것인지 표정과 동작이 자연스러워지면서 사진도 점점 마음에 들게 변해갔다. 잠시 모델을 해볼까란 상상을 하다가 선을 넘은 발칙함에 스스로 머리를 털었다. 그래도 한결같이 떠나지 않은 생각은 내가 지금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 목표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바로 내 눈앞에 잔뜩 있었다.


자신 있는 포즈를 마지막으로 촬영은 모두 종료되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연거 푸하고 저 뒤에서 다가오는 관장님이 눈에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관장님."

"매화씨 오늘 최고였어! 역시 잘 해낼 줄 알았다니까!"

"관장님이 도와주신 덕분이에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운걸? 배도 고플 텐데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저 여기 오는 길에 먹고 싶은 거 잔뜩 써놨는데 다 먹어도 돼요?"

"그럼. 그럼. 다 먹어도 돼!"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로 주섬주섬 가방 속에 수첩을 꺼내 보이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관장님은 얼마든지 먹으라며 맞받아쳤다.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어치울 생각에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지만 정작 음식을 앞에 두고 많이 먹지는 못했다. 1인분도 다 먹지 못하고 숟가락을 놓게 될 줄이야. 그런 모습을 보는 관장님이 웃으며 하는 말들이 다 얄밉게 들렸다. 호기롭게 다시 숟가락을 들었지만 더 먹는 건 무리였다. 내가 위가 줄어서 많이 먹지 못할걸 알고 관장님이 큰 소리를 쳤구나 싶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는 그야말로 녹초가 되었다. 옷을 갈아입는 것도 귀찮아서 겉옷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벗어놓고 가방은 늘 있던 자리에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내 몸도 침대 위에 가로로 누웠다. 고된 하루였다. 아니, 고된 3개월이었다. 내 인생에 이토록 열정적으로 매달린 일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릴 적 친구들과 골목을 누비며 놀던 때만 떠올랐다. 그때 참 열심히 놀았지. 엄마와 아빠를 떠나보낸 그날 이후로 내 인생에는 열정이 함께 사라졌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자살을 시도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 살아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환희를 맛보지 못했을 거란 생각에 안도감과 감사한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눈앞을 팔뚝으로 가려 겨우 콧방울과 턱까지만 보이던 내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고마운 사람들이 마구 떠올랐다.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고, 책꽂이에 꽂혀있던 수첩을 꺼내어 첫 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는 펜으로 가로 줄을 주욱 그었다.


1. 바디프로필 찍기

2. 한국의 100대 명산 등산하기

3. 책 출간하기



'그래. 이제 다시 시작이다.'


비록 작은 시작이지만 오늘이 완성됨으로써 내 인생의 2막이 열린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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