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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야 Aug 21. 2024

어쩌면 행복

11화

시원한 가을바람이 살랑거렸다. 겨우 얼굴을 내비친 태양 빛이 내 발아래를 따뜻하게 녹이고 있었다. 새벽 이슬이 빛을 머금었다가 하나 둘 합쳐지더니 반짝이며 떨어졌고, 이슬을 떨군 풀잎들은 기지개를 켜는 듯 하늘을 향해 어깨를 폈다. 일찍 일어난 새들이 깃을 정리하더니 어딘가로 푸드득 날아올랐다. 그 소리에 놀랜 것인지 조금 떨어진 나무 사이의 수풀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빼꼼히 고개를 쳐들더니 다시 제 갈길을 갔다.


찌르레기가 아직 울고 있는 와중에 빼곡히 글이 적힌 수첩을 꺼내 마지막 장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었고, 이 수첩의 마지막 남은 빈 공간이었다. 이곳을 채우는 것은 어린 학생들보다 집중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나에게는 가히 특별하다 할 만한 일이다. 어릴 때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정신의학과 상담을 받다가 집중력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기억력과는 별개로 어떤 일을 하면 잠시 집중을 하는가 싶다가도 금세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수첩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고 싶다고 해서 펜을 꺼내고 글을 적다 보면 어느새 다른 게 손에 들려있기도 하고, 티브이에 정신을 팔리기도 하고, 밖에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에도 내 신경이 곤두섰다. 예민하기도 이렇게 예민할 수가 있나 싶다. 아무튼 이 수첩은 나름의 끈질긴 근성이 남아 있다는 자랑스러운 증거였다. 그래서 마지막은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서 마무리하고 싶었다. 언젠가 다시 열어볼 것을 약속하고, 그 언젠가의 나에게 메시지를 남기기로 했다.



이걸 다시 보고 있는 사람은 엄청나게 강해진 매화겠지?

헬스장 관장님 말씀이 문득 생각이 나.

'상처가 아물면 더 큰 힘이 생긴다'라고 하셨지.

난 그 말을 믿어.

상처 투성이었지만 크고 작은 상처들을 하나씩 치료하면서 힘이 나는 걸 느꼈거든.

중요한 건 '나'를 사랑하는 거였나 봐.

'나'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알아가는 게 인생인가 봐.

그래서 이제야 제대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

아주 조금이지만 방법을 알게 된 것 같거든.

매화야.

넌 정말 사랑스러워.

너무 소중한 존재야.

그러니까 매화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넌 얼마든지 해낼 수 있어.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내가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느낌이 들자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마지막까지 이 수첩을 가득 채운 홍매화가 자랑스러웠다. 수첩을 한껏 품에 안고 있다가 하늘 위로 치켜들고 한참을 바라봤다. 따뜻한 기억들이 스쳐갔다. 기억이 현재에 다다르자 수첩을 다시 가방에 넣고는 새로 산 수첩을 꺼냈다. 첫 장에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적고 싶었다. 새로운 시작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1. 바디프로필 찍기

2. 한국의 100대 명산 등산하기

3. 책 출간하기



너무 거창한가 싶어서 피식 웃음이 났다. "내가 이걸 다 해낼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다가 "무슨 약한 소리야! 무조건 해! 할 수 있어!"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다시 살기로 다짐하고서 생긴 꼭 하고 싶은 일들이었다. 대담한 계획이 담긴 새 수첩을 덮어서 다시 가방에 펜과 함께 넣었다. 잠시 눈앞에 금빛으로 밝게 물든 하늘을 바라봤다. 살기로 한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가능하면 오래 이런 하늘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장님에게 바디프로필에 도전하겠다는 얘기를 했다. 아무래도 가장 먼저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고, 얼마든지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관장님 저 바프 찍고 싶어요!"

"바프 찍는 거 좋죠! 그런데 굉장히 힘들 거예요. 식단도 꾸준히 해야 하고, 목표도 확실해야 하거든요. 실제로 도전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반은 중간에 포기하니까요."

"아... 많이 어려울까요? 꼭 해야만 하거든요."

"이야... 이거 독하게 마음먹었나 보네. 좋아요! 이런 열정이면 못 할 게 없죠! 내가 도와줄 테니까 해봅시다!"

"네! 잘 부탁드려요!"


관장님이 헬스장 입구에 걸린 멋진 사진들을 가리키면서 바프 하려면 저 정도 쉐잎은 나와야 한다며 겁을 주는 듯했지만 나는 오히려 좋다는 표정으로 끄덕이면서 반드시 저렇게 되리라 다짐했다. 관장님은 그런 내 모습이 대견해 보이셨는지 흐뭇하게 웃으시고는 사무실로 나를 데려가 식단부터 운동 프로그램까지 모든 계획을 수정해 줬다. 운동의 변화보다 식단의 변화가 눈에 띄었다. '저걸 먹고살라고?'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는걸 겨우 다시 삼켰다. 처음부터 극단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건 아니었지만 적응하기 위해서 노력은 해야 했다.


"내일부터 프로그램 시작할 거니까 오늘은 가볍게 몸만 풀고 가요. 식단도 내일부터 바로 해야 하니까 가는 길에 장도 좀 보는 게 좋겠네요. 내가 추천해 주는 온라인 구매처도 여기 적어뒀으니까 집에 가는 길에 주문해 두는 게 좋을 거예요."


순간적으로 관장님이 장사꾼으로 느껴졌지만 세심하게 챙겨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관장님이 적어준 종이를 사진으로 찍어두고 종이도 접어서 가방에 넣어뒀다. 지금 바로 운동을 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인터넷에서 '바디프로필'을 검색했다. 이미지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폰 배경화면으로 해뒀다. 이 사람처럼 멋지게 바프를 성공하고 말 거라는 나만의 부적과 같은 것이었다. 이 행동이 엄청난 효과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였다.






바프를 준비하면서 기록하는 습관은 필수가 되었다. 관장님이 만들어준 프로그램대로 진행이 되고 있는지도 체크해야 했고, 몸무게뿐만 아니라 골격근량, 체지방량 등이 목표치에 가까워지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매일 운동에 관한 피드백과 몸의 변화, 정신적인 스트레스 등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기록했다. 수기로 작성하다가 어딘가에 저장해 두면 좋겠다 싶어서 블로그를 개설했다. 직접 글씨를 쓰는 것이 더 보람찬 일이긴 했지만 매일 남겨야 하는 정보에 수기 작성은 품이 많이 들었다. 블로그를 이쁘게 꾸미는 건 관심이 없었다. 단지 운동일지를 정리해서 써두고 싶었을 뿐이었다. 스마트폰으로만 작성하는 건 꽤나 집중력을 요했고, 조금 더 쾌적한 환경을 갖추자고 마음먹고 노트북도 하나 마련했다. 새것은 아니었지만 블로그에 글 남기는데 이만하면 충분했다.


수기로 썼던 일지도 모두 블로그에 재작성해서 올려야 했다. 한 곳에서 모두 보고 싶었기 때문에 수고스러움을 감내하고 글을 옮기기로 했다. 글의 양이 많지는 않았지만 나로서는 각오가 필요한 작업이긴 했다. 아마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얼마 걸리지 않았을 것이지만 집중력이 분산되는 나에게는 이마저도 도전 과제다. 도망 다니는 집중력을 찾아가며 글을 옮겨 적은 지 4일 만에 모든 글을 블로그에 담을 수 있었다. 옮겨 적는 과정에서 내용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면서 글이 조금 더 풍성해졌다. 한 달여 기간 동안의 운동 일지가 블로그 공간에 기록되었다. 


블로그를 개설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웃님들이 생겼다. 운동 일지만 올리다 보니 아무래도 운동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나 보다. 모두들 운동에 열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서로가 올리는 글에 응원과 공감의 메시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바프는 관장님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나는 폰 배경화면 속 주인공처럼 멋진 몸매를 뽐낼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어쨌든 목표한 것을 달성하는 그 자체에 있었다. 건강한 몸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보상 같은 것이었다.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그 끝에 있다고 생각했다. 최선을 다 해야만 했고, 그렇게 했다. 의심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목표가 있었고,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것이었다. 나와 도움을 주는 많은 사람들을 믿어야 했다. 아마도 이 믿음이 없었다면 내가 몇 번이나 선택했던 포기의 길을 다시 걸었을지도 모른다.


바프를 1주일 남기고는 특별한 식단과 운동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그토록 갈구하던 목표가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극한으로 짜내는 것만이 남아있었다. 관장님이며 같이 운동하던 동생들이 주변에서 응원도 많이 해주고 용기도 북돋아 주었지만 평생 하던 욕은 이 1주일 동안 다 한 것 같다. 그만큼 고통스러웠지만 절망 끝에 죽음을 택했던 그 순간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니 한결 편해졌다.


대망의 바프 전 날, 인바디에 찍힌 숫자들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를 보여줬다. 지금이 내 인생의 리즈라는 생각이 가득 차올랐다. 도전하길 잘했고, 무엇보다 살아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그래도 아직 하루가 남았기 때문에 긴장을 늦추지는 않았다. 수분을 빼야 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물만 허용했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다음날 있을 바프 촬영이 걱정돼서 잠이 오질 않았다. 한 시간 정도를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멋지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내가 꿈속을 떠돌아다녔다.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자면서 입꼬리가 씰룩거렸던 것 같다. 무척이나 기대되는 걸 감추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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