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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야 Aug 07. 2024

어쩌면 행복

9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은 어색한 공기가 가득했다. 처음으로 내 모든 것을 내 목소리로 또렷하게 울부짖었다. 숨기고만 싶었던 과거의 아픈 기억들은 용케도 흩어지지 않고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 흩어져야 하는 기억들을 미련하게 붙잡고 있었다.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자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창 밖의 풍경은 내 눈에 담기기도 전에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내 인생에 비집고 들어온 슬픈 기억들도 이 풍경처럼 아무것도 아닌 듯이 지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내 인생이 그토록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조차 의미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상담 선생님은 내 시간을 거꾸로 돌려 다른 선택을 하게 하지 않았다. 시간을 돌리는 것은 후회를 낳고, 후회는 현재의 나를 과거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라 했다. 어찌어찌 지나온 시간은 그 자리 그곳에 놓아두고 지금 당장 내 앞에 마주한 시간에 최선을 다하자는 선생님의 말이 주변을 맴맴 돌았다. 작은 가방에서 필기구를 꺼내서 무릎 위에 놓았다. 수첩의 비어 있는 곳을 적당히 찾아 펼치고는 딸깍 볼펜을 나오게 한 후 손에 쥐고 수첩 위로 손을 옮겼다. 버스가 잠시 멈췄을 때 수첩에 재빠르게 글자를 적어 나갔다. 손이 비키고 난 수첩의 가운데에 이런 글이 적혔다.


현재에 최선을 다하자. 미래는 내 것이다.




집에 도착하니 우편물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오래전부터 남몰래해오던 학대 아동에 대한 후원 사업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할 거고 어떻게 학대 아동들을 구할 것인지 적힌 경과보고 비슷한 것이었다. 우편물을 아무렇게나 뜯어서 내용물을 꺼내어 늘 비슷한 듯 다른 내용들을 훑었다. 내가 우편물을 뜯어보는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학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아찔했던 그날의 기억과 함께 분노가 끓어올랐다. 학대 아동을 후원하기 시작한 건 강에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촌 언니에게 지속적인 학대를 받아왔던 기억이 성인이 되자 자연스레 그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돈을 벌기 시작하자마자 후원할 곳을 찾았고 지금까지 후원을 이어 오고 있었다.


학대는 피해자의 몸과 마음이 모두 다치는 일이다. 믿고 기대야 할 대상이 나를 밀어내고 고통을 주는 것이고, 몸과 마음을 모두 상처 내는 것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점은 가해자가 이 모든 상황을 통째로 부정한다는 것이다. '사랑해서 그랬다', '놀이였다', '내 아이를 교육하는 것이다' 등의 핑계를 늘어놓는다. 성인이 되어서 만난 사촌 언니에게  그땐 왜 그랬냐고 물어보았을 때 황당하다는 표정과 더불어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뻔뻔한 대답을 들었을 땐 세상에 홀로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는데 기억이 없다는 말을 하는 저 인간의 뇌에는 뭐가 들었는지 꺼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분을 단 1초라도 이해하긴 할까? 전혀 그렇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피해를 준 사람들은 대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조차 관심이 없으니까. 그 무관심과 뻔뻔함이 피해자를 더 힘들게 한다. 내 시간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서 공허한 공간 안을 떠돌게 된다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우편물들을 쓰레기통에 처박아 넣고는 끓던 분노를 가라앉혔다. 내 기억까지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편리한 생각이 잠시 스쳤다. 어렸을 때 겪은 일을 상기시키는 바람에 찝찝한 기분이 남아있는 걸 어쩌지 못하다가 재빨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운동을 하면서 기분을 털어버리고 싶었다. 평소와 같이 버스를 타고 헬스장으로 향했다. 조금 어두워진 거리가 내 기분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가방 안에서 수첩을 다시 꺼내어 아까 썼던 문구를 가만히 바라봤다. 버스 정류장이 두 번 지날동안 수첩과 허공을 번갈아 보다가 펜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문구를 다시 고쳐 썼다.


현재에 최선을 다하자. 미래는 반드시 내가 만든다.






운동을 하는 중에 몇 번이고 스마트폰의 알람이 울어댔다. 운동에 집중하고 싶어서 애써 모른 척하며 시선을 주지 않았다. 다행히도 더 신경 쓰이기 전에 알람은 멈췄다. 기진맥진 해질 때까지 땀을 뻘뻘 흘리고는 바닥에 그대로 퍼져버렸다. 잠시 멍하니 헬스장 천장의 어느 곳을 응시하다가 벌떡 몸을 일으켜서 짐을 모조리 챙겼다. 폰을 열어 알람을 확인하는 내 눈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전남편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잘 지내냐는 안부 인사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니 연락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땀에 절어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야 매화. 잘 지냈어?"

"응, 당신도 잘 지내고 있지?"

"바쁘게 지내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갑자기 연락을 했어?"

"어... 그게..."


3초도 안 되는 정적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깊은 한숨을 내쉬던 그는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아이들이 당신을 많이 찾아. 집안에서는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 애들을 위해서 용기를 내서 연락한 거야. 너만 괜찮으면 아이들하고 연락하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해서..."


기가 막힐 노릇이다. 나에게서 그렇게 찢을 듯이 뺏어갈 땐 언제고 아이들이 찾으니 엄마 역할을 해달라는 꼴이 아닌가. 비꼬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다가 어릴 적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가 생각났다. 내 아이들에게 나와 똑같은 상황을 만들 필요는 없었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애들은 잘 있는 거지?"

"그럼. 다만, 엄마를 많이 그리워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지금은 바쁘니까 내일 다시 연락할게"

"그래, 내일 다시 얘기하자"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액체가 땀인지 다른 것인지 분간이 안 갔다. 확실한 것은 내 눈시울이 붉어졌고, 한동안 고개를 들 수 없었다는 것이다. 샤워도 하지 않고 헬스장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다가 으슥한 건물 모퉁이를 돌아 들어갔다. 네온사인이 가득한 거리와 다르게 내 모습은 어둠에 묻혀 알아볼 수 없었다. 이윽고 통곡의 소리가 그 안을 가득 채웠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산 위에서 다짐했건만 또 울고 말았다. 슬픈 게 아니라 기뻐서 우는 거니까 괜찮지 않냐며 마음속으로 하늘에 용서를 빌었다.


한참이 지나 빛 속으로 내 모습이 드러났다. 땀은 다 식어 있었지만 눈가에 촉촉한 눈물은 조금 전까지도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누구든 알 수 있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버스가 도착했고, 버스에 올라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뒷자리로 갔다. 눈물에 퉁퉁 불어버린 모습을 조금은 감추고 싶었다. 맥없이 고개를 창에 기대고 멍하니 밖을 바라봤다. 창 밖으로 네온사인들이 어지럽게 지나갔지만 내 눈은 초점을 잃어 빛을 쫓지 않았다. 버스는 순식간에 집 앞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인도 위에 올라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반쪽이 되어버린 달과 부족한 빛을 채우는 별들이 흩어져 있었다. 


'젠장. 더럽게 아름답네.'


알 수 없는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살짝 떨궈 미소를 감추려고 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땀을 씻지도 못해 찝찝하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몸이 지쳐있는데도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갈피를 못 잡고 떠돌아다니던 생각들은 해가 뜰 때까지도 떠나지 않았다. 동이 트자 머리맡에 둔 스마트폰을 더듬더듬 찾았다. 전남편이 보낸 메세지함을 열고 메시지를 입력했다. '전송'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파르르 떨었다. 엄지로 버튼을 꾹 누르곤 스마트폰을 머리맡으로 다시 던져 놓았다. 그제야 나는 잠을 잘 수 있었다. 오랜만에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후 스마트폰의 진동이 울리더니 화면에 짧은 메시지 알람이 나타났다.


'고마워. 아이들이 정말 좋아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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