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밝은 빛에 눈앞이 벌게지는 것을 느끼곤 이불을 끌어당기며 빛을 등져 누웠다. 몇 번 푸우거리며 잠을 다시 청하려다가 무언가 까먹은 듯 이불을 확 재꼈다. 벽 한 구석에 걸려있는 시계는 10시 언저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 몸 부서져라 운동을 하고 온 다음날이면 늘 이렇게 되었다.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돌려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햇빛 주변 어딘가로 시선을 한 번 주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고 두 손을 꼭 잡고 손바닥을 하늘 위로 펴 올렸다. 온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렇지 않게 다시 손을 풀고 침대에서 튕겨지듯 일어났다.
본능적으로 냉장고 앞으로 걸어가 냉장실 문을 열곤 생수통을 꺼내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미처 입에서 넘어가지 못한 물이 남은 상태로 햇빛이 쏟아지는 창 밖을 다시 쳐다봤다. 물을 마저 삼키면서 첫 끼니로 무얼 먹을지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 생수통을 다시 냉장고의 원래 자리로 넣어 놓고 허리를 더 굽혀 닭가슴살 한 팩과 미리 해둔 밥과 김치를 꺼낸다. 운동을 시작한 이후로 매일 챙겨 먹는 식단이다. 자극적인 음식이 먹고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메뉴 고민 안 해서 좋다는 생각으로 흘러간다.
전자레인지에 음식들을 데우고 작은 2인용 식탁 위에 음식들을 제 위치로 내려놓았다. 숟가락과 젓가락도 가지런히 놓았다. 간신히 눈곱만 띠어낸 얼굴로 햇빛을 마주 보고 앉아 잘 먹겠다는 인사로 식사를 시작했다. 늘 먹는 밥이 뭐 특별할 게 있다고 유난히 달달하게 느껴졌다.
간단하게 설거지를 마치고 운동복을 대충 꺼내 입고는 옷걸이에 걸린 모자 하나를 슬쩍 빼서 머리에 눌러썼다. 운동화에 발가락부터 집어넣고는 더 깊숙이 넣어 바닥에 탁탁 치며 뒤꿈치까지 쏙 넣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와 두리번거리다 집 근처 작은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건물들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발아래로 들어왔다가 지나갔고 가끔은 심심하지 않게 까치며 작은 새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저 작은 새들도 살기 위해서 바삐 움직인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가 다시 느려졌다. 좁은 길에 사람이라고는 나 하나뿐인데 차들이 늘어서있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 이래는데 차 가진 사람이 이렇게 많았나 싶다. 나 혼자만 힘든 건가 하는 삐딱한 마음이 들었다가 다시 새소리에 흠칫 재정신으로 돌아온다. 공원은 한적했지만 드문드문 보이는 벤치에 아줌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소리가 들렸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지는 않아 얼른 귀를 거두고 시선을 돌렸다. 산책 나온 강아지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색에 곱슬한 털을 가진 녀석이었는데 까만색 콩이 눈과 코에 이쁘게 붙어있었다. 저 강아지 이름은 뽀슬이 아니면 콩이가 분명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외출 준비를 했다. 할머니 집을 나와서 혼자 살아보겠다고 호언장담 했지만 허전함을 느낄 때마다 올라오는 우울한 감정은 좀처럼 이겨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나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수소문 끝에 꽤 유명한 정신병원의 심리 상담 선생님을 만나기로 했고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병원으로 가는 내내 초조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얼마나 아픈 상태일까. 자살시도까지 했으니 분명 상태가 좋을 리는 없어. 갖가지 상상을 하느라 버스 밖의 풍경을 감상하지도 못했다.
병원에 들어서 안내 데스크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내 이름을 얘기하고 예약했다는 사실을 알리자 직원이 잠시 기다리시라 말하고는 다른 업무에 몰두했다. 잠시 후에 그 직원이 빼곡히 인쇄된 종이 몇 장을 겹쳐 들고 오더니 펜 한 자루와 함께 내게 내밀었다.
"이건 사전 질문지인데, 항목이 좀 많아요. 저기 옆에서 천천히 작성해 주시고 끝나면 말씀해 주세요."
"저기... 답변하기 어려운 게 있으면 어떻게 하면 되나요?"
"비워두셔도 되는데 가능하면 답변에 마킹해주세요. 작성하시다가 궁금한 거 생기시면 또 데스크로 오셔서 말씀해 주세요."
"네..."
직원이 알려준 곳에는 카페의 작은 원형 테이블이 두 개 놓여 있었고 그중 가까운 곳으로 가서 질문지를 내려놓고 앉았다. 펜을 들고는 손가락에서 한 바퀴 돌려 다부지게 쥐고는 질문지의 문항을 읽기 시작했다. 첫 장은 가벼운 질문들이 나와서 긴장을 풀게 만들더니 뒤로 넘길수록 답변이 곤란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세 장째에 접어들자 참지 못하고 펜을 내려놓고는 벌떡 일어나 정수기 앞으로 가 물을 연거푸 벌컥벌컥 마셨다. 질문들이 나를 옥죄여 오는 느낌이 들어서 버틸 수가 없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고작 10분이 갓 지나있었다. 초등학생들도 40분씩 수업을 받는다는데 내 집중력은 그야말로 형편없다는 생각을 했다. 손에 쥔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집어넣고는 다시 질문지가 놓인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데스크에 앉아 있던 다른 직원과 대기 중이던 사람들 몇 명이 흘깃 훔쳐보는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이려니 하고 넘겼다.
긴 한 숨을 조용히 내뱉으면서 테이블을 앞으로 당겼다. 질문지가 눈앞에 가득 들어오자 펜을 쥐고 있는 손에서는 땀이 스멀스멀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질문지에 마킹을 할 때마다 미끄러진 펜을 다시 고쳐 잡았다. 마지막 질문지까지 체크를 하고 고개를 들어 시계를 봤다. 15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아까보다는 선방했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질문지를 간추려 직원에게 가져다주었다.
"여기, 질문지요."
"항목이 좀 많죠? 오시는 분들 모두 힘들어하시더라고요. 잠시만 앉아 계시면 선생님하고 상담 진행하실 수 있으세요."
"네 고맙습니다"
자리로 돌아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직원이 부르는 소리에 다시 일어나서 직원을 따라갔다. 상담실이라고 적힌 문 앞에서 직원이 멈춰 서더니 문을 두드리고 나를 문 안으로 들여보냈다. 40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선생님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면서 옆 자리로 안내했다. 크고 편안해 보이는 의자가 두 개 놓여 있고, 그 사이에는 작고 낮은 원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네모난 갑 티슈와 작은 화분이 하나 있었는데 꽃봉오리가 살며시 올라온 것이 보였다. 마주 보고 앉은 선생님이 내가 열심히 체크한 질문지를 빠르게 다시 넘겨 보시면서 입을 떼셨다.
"홍매화님은 마음이 많이 다치신 것 같아요. 과거에 심한 충격을 받은 경험이나 학대를 받으신 경험이 있으세요?"
"..."
"지금 대답하기 곤란하시면 억지로 대답하실 필요는 없으세요. 그럼 질문을 조금 바꿔볼게요.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어떤 것들이 있으세요?"
"당장 기억나는 건 아이들..."
아이들을 내 머리와 가슴속에서 지워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입에 담는 순간 눈물이 또르르 흘러나왔고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선생님은 익숙하다는 듯 능숙하게 테이블 위에 있던 티슈를 두 장 뽑아 나에게 건네줬다.
"괜찮아요. 마음껏 우시고 진정되면 다시 얘기 이어가셔도 돼요."
잠시 마음을 추스른 다음 말을 이어갔다.
"아이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저에게는 너무 소중해요. 나를 사랑하고 아껴준 남편과의 시간도 저에게는 행복했던 시간들이에요. 하지만 이제는 모두 내 곁에 없어요."
"그랬군요. 행복한 시간에 대한 기억은 매화씨를 지탱해 줄 수 있는 힘이 될 테니까 나도 행복해도 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선생님 저는 행복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아요. 이혼 후에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요. 내가 쓰레기 같아요."
분노와 슬픔이 함께 내뱉어진 후 다시 눈물이 차올라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괜찮아요. 매화씨, 마음껏 울어요. 내가 기다릴게요."
선생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막았던 댐이 터지듯 울음이 터져 나왔다. 조용한 상담실에 내 슬픔이 가득 찼다. 더 이상 채울 곳이 없을 때까지 울다가 천천히 사그라들었고 훌쩍거리며 남은 슬픔을 정리했다. 작은 테이블에는 내 슬픔으로 적신 티슈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눈치챘고, 이제는 말할 준비가 되었다. 조용히 시작된 나의 슬픈 이야기를 선생님은 온화한 표정으로 묵묵히 들어주었다. 내 이야기를 가감 없이 모두 얘기한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은 항상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살아온 무게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매화씨 인생은 영화 같아요. 인생에 수많은 고통이 있었을 텐데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당장은 아니더라도 글을 써보시는 건 어때요? 매화씨가 살아가고 있는 사소한 것도 글로 남기다 보면 먼지만큼 작은 성장도 눈치챌 수 있거든요. 언젠가 그것들을 돌이켜보면 내가 정말 대단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될 거예요."
"글이요? 저는 책 읽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걸요. 글 쓰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한 줄이라도 좋아요. 모든 일은 처음엔 어려운 법이잖아요. 매화씨는 잘 해낼 거예요."
애써 참았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슬픔이 아닌 기쁨, 좌절이 아닌 용기와 희망의 눈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