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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야 Jul 24. 2024

어쩌면 행복

7화

실컷 눈물을 쏟고 나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산 너머로 반은 모습을 가린 태양이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태양은 하늘을 가린 구름을 빛으로 적셔 노란색으로, 주황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눈동자에 미동도 없이 하늘을 지켜봤다. 불현듯 지구는 엄청나게 거대하고 무거우면서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지런히 돌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새삼 웅장함을 깨달았다.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포기하는 건 지구가 도는 것을 멈추는 것과 같이 너무 비겁하고 무책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자 내 몸이 둥글게 웅크려지다가 다시 펴졌다.


'아니야. 살아보자. 정신 차려 매화야!'


너무 쉽게 포기하기만 했던 지난날들을 후회한들 내일이 바뀌지 않을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결국 나의 선택이 중요했다. 하늘을 향해 어깨를 쭉 펴니 허리가 곧게 일어났고 그대로 상쾌한 공기가 가슴 깊숙이 드나들었다. 후련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산을 내려왔다.


걷는 내내 많은 생각이 겹쳤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 나를 학대하던 사촌언니, 학대를 피하려 했던 자살시도, 행복했던 결혼생활, 금쪽같은 아이들, 우울증에 시도했던 몇 번의 자살시도, 그럼에도 살아남아서 내일을 살기 위해 있는 나. 순탄치 많은 않았던 인생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부터 우울감에 빠질 때면 시도했던 일들은 남들에겐 두려운 일이었지만 나에겐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힘든 일을 할 때면 죽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붙이는데, 나는 한 발 더 나아가 서슴없이 인생을 포기하려 했다. 겉보기완 다르게 정신력이 남다르게 약했던 건지. 누군가 정신을 지배하려면 신체를 단련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들었다. 우울감에 술에 기대거나 몸에 상처를 내는 행동만 했던 나약한 정신 상태를 고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동안 마주하지 못하고 피해왔던 고통을 감내해야 할 시간이 필요했다. 




집 근처에 가까운 헬스장을 찾았다. 먼 길은 아니었는데 걸어가는 내내 몇 번을 다시 돌아갈까 망설였다. 헬스장의 간판이 보이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첫사랑 만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건지 모르겠다. 마침내 건물 앞에 도착해서는 고민 없이 건물 안으로 걸음을 이어갔다. 고작 3층을 올라가는데 숨은 턱까지 차올랐다.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내 눈앞에 보일 듯 말 듯 주먹을 다부지게 쥐어본 후 문을 열었다. 후끈한 열기에 땀냄새와 쇠냄새가 섞여 나왔다. 순간 멈칫했다가 다시 고개를 들이밀어 안으로 들어갔다. 한눈에 보기에도 잘 관리된 몸을 가진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전화 주신 분이시죠?"

"네"

"아유, 잘 오셨어요. 안으로 가서 얘기 나눌까요?"


남자는 자신을 장님이라고 소개하며 기구들을 몇 개 지나쳐서 작은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방이라곤 해도 유리로 뚫려있어서 훤히 들여다 보이는 공간이었다. 관장님은 앉으라는 말과 함께 한쪽 벽에 서있는 수납장 비슷한 것에서 티백을 꺼내 작은 종이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받았다. 차가 잘 우러나게 한 두 번 들었다 놨다 하더니 몸을 돌려 내가 앉은 맞은편에 앉으면서 컵을 내밀었다.


"운동은 해 본 적 있으세요?"

"네, 몇 년 전에 조금 해봤어요"

"아 그러셨구나.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운동하러 오신 목적이나 목표가 있으세요?"

"... 내 몸을 혹사시키고 싶어요"

"그건 제 전문이죠! 제가 건강하게 혹사시켜 드리겠습니다."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는 것도, 나를 믿어달라는 당당한 태도도 마음에 들어 여기서 운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실은 우울한 기분을 떨쳐낼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몇 가지 주의사항과 이용 안내를 받고 회원 접수를 진행했다. 관장님이 접수 처리를 하는 동안 유리 건너에 보이는 다른 사람들이 운동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다들 열심히 살고 있구나 하며 멋쩍어 하던 차에 접수가 끝났고 이제 여길 나가서 뭘 할까 고민하며 일어났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관장님"

"오신 김에 운동 조금 하고 가실까요?"

"지금요? 운동복도 안 챙겨 왔는데요"

"걱정 마요. 여기 운동복 많아요."

"네.. 그럼 조금만 하고 갈게요"


장님은 편하게 운동하다가 가라는 말과 함께 헬스장 한편에 쌓여있는 운동복 중에 한 벌을 꺼내어 건네주었다. 옷을 갈아입고 트레드밀 쪽으로 오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트레드밀을 찾았다. 탁 트인 창가에 놓인 트레드밀에 오르려고 하자 장님이 어디선가 달려와서는 조작법을 알려주기 시작하셨다. 이건 사용할 줄 안다고 말하려다가 모르는 척하고 듣기로 했다. 알고 있던 정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는 뿌듯한 표정으로 트레드밀을 조작해 걷기 시작했다. 관장님은 내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 엄지를 치켜들어줬다. 양 옆으로 같은 트레드밀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와 쇠끼리 달그락 거리는 소리, 기구들이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땀으로 옷을 적시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이렇게 혼미해지도록 운동을 하면 이 시간 동안은 내가 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마음이 그렇다는 것과는 별개로 술에 담가져 있던 몸이 좋을 리 없다. 쇳덩어리들은 왜 이리 무거운지. 마치 내 인생에 무게가 있다면 이런 걸까 싶었다. 숨을 돌리면서 맞은편 기구 너머에서 벤치프레스를 하는 사람을 흘깃 보고 있는데 관장님이 옆으로 슬쩍 다가왔다.


"매화씨, 오늘도 나왔네요?"

"아, 네. 안녕하세요."

"운동하니 개운하죠?"

"네, 운동하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안 나니까요."

"운동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내 몸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져야 해요. 안 그러면 꼭 다치더라고."


다칠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관장님이 직접 하는 얘기를 들으니 아찔한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흠칫하면서 대답할 박자를 놓쳤다. 다행히 관장님이 능숙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운동 열심히 하고 나면 근육이 찢어질 듯 아프죠? 그건 정말 근육이 상처를 입은 거예요. 그런데 근육이란 게 신기하게도 상처를 회복하면서 더 단단해지고 강해져요. 우리 운동하는 사람들은 근성장을 위해서 상처 내길 좋아하는 사람들인 거죠."


관장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얘기했고, 난 이번에도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떨구고 표정이 사라졌다. 내 인생이 상처 그 자체인데 난 왜 아직도 단단해지지 못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어지는 관장님의 말에 의문이 풀렸다.


"그런데 상처의 고통을 느끼는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고 상처에 대처하는 것도 달라요. 운동을 해본 사람들은 알 거예요. 상처가 나면 건강하게 아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걸요. 안 그러면 상처가 벌어진 채로 상처를 더 입히게 되거든요. 이 상태가 반복되면 결국은 상처가 주는 고통에 시달리다가 운동도 포기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매화씨도 상처들 잘 달래주고 관심 가져줘서 평생 건강하게 운동하는 걸 목표로 해보세요."

"자세히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노력 해볼게요."


감사하다는 말을 간신히 꺼내자 관장님은 특유의 환한 미소를 머금고 열심히 해보자는 말과 함께 다른 회원에게로 가셨다. 근육의 상처가 내 인생의 어두운 날들이었다면 나는 헝겊조각 같이 너덜한 상태일 것이다. 깊게 해진 상처를 방치하는 것도 모자라 더 깊은 상처를 내려고 발악을 했으니 떨어져 나가지 않고 붙어 있는 것도 용하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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