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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 남과 여의 일상

이야기, 열둘

by 방자
바다 갈까?


‘바다?’ 나는 하던 일을 접고 따라나섰다(바다 무지 좋아함). 그가 구글 맵을 보며 앞장섰고 나는 뒤 따른다. 동네를 지나고 작은 광장과 차들이 쌩쌩 달리는 차도를 건너 바다가 훤히 보이는 곳까지 왔다. 생각과 달리 바다 앞에는 담을 쌓아놓은 건물들이 있어 더 이상 다가가기 힘들 것 같다. 이건 아닌데 싶어 '돌아갈까?' 하고 말을 건넨다(나는 가고 싶더라도 상황이 아니면 쉽게 포기하고 다른 길 찾음). 그가 내 이야길 들었는지 말았는지 부지런히 앞장서 간다(그는 목표가 있으면 어쨌든 집중해서 열심히 감). 나름 차들이 쌩쌩 달리는 무덥고 매연과 먼지가 날리는 길에서 수차례 위험한 무단횡단도 감행하며 쫓아가지만 딱히 거리가 좁혀 지지도 않고, 불러도 안 들리는지 대답도 없이 한참을 앞장서 가니 뒤돌아 갈 수도 없자 슬슬 짜증이 난다. 한참 뒤 돌고 돌아 마을 어귀까지 들어서서야 그가 내게 표정이 안 좋단다. 옛날 같으면 '아냐, 괜찮아. 더워서 그래'라며 굳이 불편함을 키우지 않고 그냥 넘겼겠지만, 그게 관계에 득 될 게 없단 걸 배운 나는 '그럼 안 좋지.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불러도 대답 없는 널 따라 엄청난 매연을 먹으며, 수차례의 위험한 무단횡단을 하며 걷고 있잖아... (이건, 혹시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혼자 다니는 것보다 훨씬 경험이 안 좋다고.)'라고 그를 빤히 바라보며 줄줄 내뱉는다. 이제 그의 얼굴이 좋지 않다. 그 후로는 나를 앞에 가게 두고 한참 뒤에서 사진을 찍으며 어슬렁어슬렁 걸어온다. 약간의 미안함과 가시지 않은 서운함을 짊어지고 한참을 가다 언덕배기에서 허름하지만 수동식 에스프레소 머신을 갖추고 있는 작은 카페를 발견했다. 내가 안을 슬그머니 들여다보니 바에서 일을 하던 청년이 나를 보곤 들어와도 좋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 한다.


여기야, 여기서 커피 한잔 하고 가자.


나는 어제 못 먹은 커피를 생각하며 비를 기다려 카페에 들어섰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도 남자들만 있긴 하지만 내가 들어가기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곳은 아니다. 어렵사리 에스프레소 2잔을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문 위에 걸려있는 텔레비전에선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이 방영 중이다. 전체적으로 허름하지만 주인의 취향과 애정 어린 손길들이 느껴지는 작은 카페. 에스프레소 두 잔의 가격은 60 디나르. 맛이 괜찮다. 카페인이 목을 타고 넘어가며 피에 스며드는 듯한 느낌을 즐기면서도 갈증에 시원한 물 한 병을 사 마실까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주인장이 어떻게 내 맘을 알았는지 물병 하나와 잔 두 개를 가지고 와 슬며시 테이블 위해 놓는다. 어떻게 알았지? 딱 봐도 파는 물인데 이런 감지덕지가. 나는 벌써 기분이 좋을 대로(아마도 낯선 사람에게 기대 이상의 호의와 배려를 받아서) 좋아져 그에게 서운하던 맘도 싹 씻겨 내려갔다. 물값이라도 지불하고 싶어 주머니를 살피는 나에게 그가 호의는 호의로 받는 거야라고 말해 그저 감사하단 말과 미소를 남기고 나왔다. 꼭 다시 가야지.


저녁 먹으러 갈까?


오늘 저녁은 며칠 전 봐 둔 늘 사람이 바글거리는 집 앞의 케밥 가게에서 먹기로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아랍어와 불어 메뉴. 구글 번역기도 우리에게 답을 주지 않는다. 그림과 단어의 조합으로 우리는 치킨 케밥 플래이트 하나랑 램 케밥 샌드위치 하나, 콜라 캔 하나를 시켰다. 내 눈에는 뭔가 혼란스럽게 정렬된 메뉴판이 이상해 보였고, 주문을 받은 사람에게는 같이 와서 하나는 플래이트, 하나는 샌드위치로 시키는 우리가 이상해 보였던 것 같다(샌드위치는 일반적으로 케밥 하면 생각나는 롤에 고기와 샐러드, 소스를 넣고 말아서 싸주는 가벼운 식사용이고, 플래이트는 고기, 샐러드, 소스 외에 감자튀김 등을 얹어 쟁반에 보기 좋게 담아 나오는 정식용에 가까움. 우리는 둘 다 맛보고 싶어서 하나씩 시켰지만 대부분은 내용물에 들어가는 고기는 다르게 시켜도 차림은 같은 것으로 시키는 듯함). 알제리 식당 어디서나 주는 바게트 빵 한 바구니, 양념, 플래이트 하나, 샌드위치 하나, 그리고 캔 콜라 둘(한 개 시켰는데 당연하다는 듯 두 개 가져다 줌)이 나왔다. 우리는 샌드위치를 번갈아 건네며 열심히 먹는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렇게 하나의 샌드위치를 돌려 먹는 게 신기하다는 듯 힐끔거린다. 근래에 먹었던 케밥 중 가장 맛있는 것 같았다. 다양한 조합의 사람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풍경이 정겹다. 다 먹고 비가 주문표를 들고 나와 계산을 했다. 1,450 디나르. 나는 종업원이 버리려던 영수증을 들고 나왔다. “계산이 잘 못된 거 같아. 1,100 디나르 정도여야 하는데(늘 주문할 때 반올림 값으로 대충의 가격을 계산하는 나). 이건, 둘 다 플레이트로 계산한 가격 같은데?” “어, 그런가?” 그가 영수증을 가지고 다시 들어가 확인을 요청했고 종업원은 확인해보더니 자기 실수라며 350 디나르를 돌려줬다. 우리는 나와서 그의 고의성에 대해 논했다(러시아에서는 고의가 분명한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었다. 내 여행 생에는 훨씬 많았고. 흥미롭게 일부 사람들은 말을 못 하면 계산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그게 그들 잘못이라고 생각하진 않고 그냥 내가 열심히 계산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내 돈의 쓰임은 내가 케어하는 게 맞고, 계산도 한국인인 내가 훨씬 잘 할 확률이 높다고 믿는 편이므로. 그는 돈 받는 쪽에서 당연 알아서 잘 해야 한다고, 그리고 할 거라고 믿었으나 이번 여행에서 믿음이 조금씩 깨지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전 사례들과 달리 고의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딱히 이유는 없고, 그저 직감으로 그런 눈치가 아닌 거 같기도 했고, 주문서가 허술한 데다 우리처럼 시켜먹는 사람이 없어 보여서이다. 그는 모르겠다고 했다. 아직까지 내가 고의라고 확신한 사람들도 다들 높은 연기력을 가지고 천연덕스럽게 굴었으므로 자신은 알 길이 없다고.


결심했어. 난 콘스탄틴 가서 비행기 표 바꾸고 일찍 나갈 거야.


그가 말했다. 전처럼 ‘그냥 비행기 표 바꿔서 빨리 나갈까?'가 아니라 ‘나갈 거야'였다. 즉, 내가 같이 나가던 말던 본인은 나가겠다는 결정이었다. 우리의 비자 이슈가 붉어지고 난 며칠 후부터 두어 차례 이야기했던 부분이다. 사하라를 보러 왔는데 사하라를 볼 수 없다면 굳이 알제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어차피 생긴 비자 이슈지만 늦게 나갈수록 문제가 될 확률도 커지지 않겠냐며 그럼 사하라에 가기 위해 알제리에 다시 올 수 없을까 걱정이라고 했다(내 추측엔 굳이 머물 필요 없는 이곳의 인터넷 환경이 업무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 결정적 이유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솔직히 말해 알제리에 딱히 오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번에 사하라를 못 간다고 해도 이 먼 곳까지 여러 가지 번거로움을 해결하며 사하라를 보기 위해 다시 올 생각도 없다. 그리고 우리가 행운을 만난다면 비행기를 타야 하는 사하라 중앙은 아니어도 사막 시작점쯤에는 여정의 마지막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누가 나가라고 한 것도 아닌데, 비싼 항공 수수료를 지불하며 비행기표를 바꾸고 나가고 싶진 않다(나는 모아 둔 돈 쓰며 여행하는 버짓 여행자이라 예산에 조금 민감한 편이고, 그는 그래도 돈을 벌며 다녀서 인지 혹은 원래의 성향인지 절약하는 편이지만 굳이 비용을 막 계산하고 그러진 않는다). 어차피 내일로 바꿀게 아니라면 언제든 누군가 나가라고 하면 또다시 바꿔서 일정을 조정해야 하는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기도 한 데다 어쨌든 어렵게 왔고(그 어려움 모두가 돈은 아니어도 비용이라는 게 내 생각), 뭐가 됐던 여기 있으면서 배우고 느낄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결정을 했고, 이제 나도 결정을 해야 한다. 그와 함께 나갈 것인지, 혼자 알제리에 머물며 일정을 채울 것인지(어차피 이후 서로의 일정이 다르기 때문에 따로 나가는 건 문제가 되질 않음. 그는 오로라를 보러 아이슬란드로 가고 나는 지중해를 즐기러 크로아티아로 갔다 한 달 후 즈음 다시 헝가리에서 만나기로 함), 나는 또 다른 선택의 기로 앞에 섰다.


우리는 다르다. 주변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닮았다며 잘 어울린다고 했지만 나는 (아마 그도) 안다.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 성별에 의한 취향의 차이, 경험에 의한 사고의 차이, 주어진 환경의 차이, 생활방식의 차이.. 종종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그건 수많은 다른 부분들에 비하면 어쩌다 만난 일상의 행운처럼 아주 가끔씩 찾아오기에 더 존재감 있게 느껴지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24시간의, 주 7일의, 월 30일의 그렇게 반년이 넘는 시간의 긴 여정을 함께 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서로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 성찰하여 자신을 개선해 나가기 때문이라고 (둘 중 하나만으로는 혹은 둘 중 한 명만으로는 매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함)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읽고 ‘어머, 쟤들 고비인가 봐?’ 할 수도 있겠지만(대부분 남 일일 때 쉽게 드는 생각), 사실 이것은 우리 일상의 하나의 스텝일 뿐이다. 서로 걸음을 맞추고 함께 길을 가기 위해 주고받으며 맞춰가는 하나의 스텝. 이걸 진작에 알았더라면 사람으로서, 여성으로서 내 삶과 관계가 조금은 달랐을 것 같다. 하지만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기도 하다.


<표지 사진 : 내게 감동의 에스프레소를 선사한 골목길 작은 커피숍에서>


이 글은 객관적으로 묘사하려고 노력을 했으나 매우 주관적인 남과 여의 <여> 입장에서 쓰였으며, 업로드 전 <남>의 감수를 받았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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