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열 하나
'우리 바다 갈까?’ ‘아니, 난 오늘은 집에서 일이나 할래.’ ‘응.. 그럼 나도 그냥 집에서 빈둥대야지.’ 요 며칠 새로운 버전의 앱 출시를 앞두고 한국하고 소통해야 할 일이 많은 비는(비는 돌아다니면서도 여전히 일하는 소프트웨어 개발자이다. 그는 돌아다니면서도 일을 해 돈을 버는 디지털 노마드, 나는 모아둔 돈 열심히 쓰며 돌아다니는 방랑 여행자라고 할 수 있음) 시차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 몇 시간 일을 하다 오전 내내 자는 패턴으로 살고 있다. 덕분에 나는 오전에 글 여유롭게 글 쓸 시간을 가질 수 있긴 한데, 뭔가 심심하기도 하다(놀 사람도 없는데 안 놀아 줌. 완님은 오랑 일정 마치시고 알제로 돌아가심). 오전, 이른 오후 내내 빈둥대다 결국 혼자 길을 나섰다.
나갔다 올게~
딱히 가보고 싶은 곳, 가야 할 곳에 대한 정보가 없으므로 일단 밤마다 나는 음악소리의 정체를 밝혀보고자 밤이면 음악 소리가 나던 광장 옆 공원에 가보기로 했다. 공원을 지나 들어가 보니 커다란 공연장이 있다. 1,000개 정도의 의자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구글맵에서 내 위치를 확인해 보니 theatre de verdure. 아마도 야외극장이고 요즘에 콘서트 같은 게 열리는 시즌인가 보다. 한동안은 몇 개의 스퀘어를 거치며 카페를 찾아 헤맸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대부분 남자들만 있는 곳이 많았고, 카페인데 커피를 팔지 않는 곳도 있었다. 지난번 비와 카페에 갔었는데 나한테 지하로 내려가라고 해서 보니 1층에는 남자밖에 없던 기억이 있어 뭔가 문화적으로 남녀 좌석의 구분이나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건, 이 동네 없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아니고 그저 에스프레소 딱 한 모금인데.. 그거 하나 사 먹을 곳을 찾지 못하다니 서럽다. 아무래도 남성 중심의 사회, 약간의 경직 사회임이 느껴져 행동이 자유롭지만은 못한 나이다.
걷기도 힘들고 해서 트램을 타고 어디든 다녀와 보기로 했다. 오랑에 신식 트램이 돌아다니는 걸 본 적 있던 터라 유럽에서 종종하던 트램 투어에 도전(이 동네에는 관광 목적으로 트램을 타는 사람은 없겠지만 뭐 남들이 내가 뭘 하는 건지 알리도 없으니)하기로 했다. 표 파는 곳 앞에 서서 슬쩍 눈치를 보니 50 디나르를 내면 표 한 장을 주고 10 디나르를 거슬러 준다. 그럼, 편도 40 디나르. 나는 어디든 갔다 올 거니까, 왕복으로 2장. 100 디나르를 내고 손가락 두 개를 보여줬다. 표 두 장과 거스름 돈을 받고, 먼저 온 트램에 올랐다. 유럽과 비슷하게 티켓을 머신에 넣고 validate(스스로 검표?) 하는 방식인 것 같았다. 그래서 티켓 한 장을 머신에 넣었는데,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확 나에게 쏠리는 걸 느꼈다. 꿀꺽, '왜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진실은 알 길이 없음) 트램을 타고 한참을 가다 보니 한정된 공간에서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여성들이 쓴 히잡을 고정하는 핀이나 액세서리 같은 거였다. 화려한 화장을 한 사람들은 히잡과 의복에서도 섬세한 화려함이 느껴졌다. 나를 쳐다보는 저 시선은 낯선 동양인을 신기하게 보는 시선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내가 너무 눈에 띄는 외모를 가졌다는 생각을 처음 해 봤다. 나도 히잡을 하나 구해 쓰고 다니면 나으려나? 흥미롭게 몇몇 사람들이 새로 탈 때, 내리는 사람에게 표를 건네받는 것을 보았다. 서로 아는 사이인지 모르겠지만(여러 번 봄) 어차피 한번 쓴 표는 한 방향 내내 쓸 수 있으니까 그냥 저런 식으로 재활용하나 보다. 40 디나르면 25센트. 우리나라 돈으로 300원 정도밖에 안 하지만 여기서는 바게트 빵 두 개를 살 수 있는 금액이므로 적지 않은 돈인 듯도 하다. 트램이 가는 길에 그랜드 모스크가 보여 일단 거기서 내렸다. 뭔가 크고 화려하면서 단아함이 느껴지기도 하는 건물이다. 우리가 알제로 돌아가려면 이 근처에서 출발하는 승합택시를 타면 된다고 들은 터라 주변을 둘러봤지만 택시로 보이는 차들을 찾을 수는 없었다. 모스크에 들어가 보고 싶지만 들어가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문 앞에서 기웃거리는데 경비 아저씨가 뭐라 뭐라 한다. 이리 오라는 건지 저리 가라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워하던 차, 나를 지나쳐 간 두 여성 둘이 되돌아오더니 영어를 할 줄 아냐며, 모스크에 들어가고 싶은 거냐고 물었다. 내가 끄덕이자 아저씨와 뭐라 뭐라 이야기하고 자기끼리 이야기하더니 자신들을 따라오란다. 일단 내 복장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고 했는데 경비 아저씨가 서 있던 곳 뒤로 가니 작은 공간이 있고, 아저씨가 거기서 옷 한 벌과 스카프 한벌을 빌려주셨다. '이거 입어도 되지?' ‘응!’ 뭔가 남성용 옷 같았지만 나는 그들이 입혀주는 데로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상의를 입고, 머리에 스카프를 둘렀다. 그때까지는 그들의 나이가 가늠되지 않았는데 어색하게 옷을 입은 날 보며 이쁘다며 깔깔대며 웃는 둘을 보고 활짝 핀 청춘을 느꼈다. 그들은 내게 한국인이냐고 물어준 첫 번째 알제리 사람이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 내 얼굴이 딱 한국인이란다. 아마도 어디선가 한국 사람을 봤거나 한국 드라마를 봤나보다(완님 말이 여기도 은근 한국 드라마를 보는 젊은 층이 있다고 했다). 둘은 나를 데리고 성전 지하로 내려가 씻는 법을 알려주었다.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를 드리려면 치러야 할 절차라며 손, 입, 코, 눈, 얼굴, 팔, 다리를 오른쪽에서 왼쪽 순으로 세 번씩 물을 끼얹혀 씻게 하고(이 의식 이름이 뭔지도 알려줬지만 까먹음. 둘은 머릿속에서 아랍어를 불어로 그 다름 불어를 영어로 바꾸는 식으로 영어가 나온다고 하며 상당히 많은 부분을 아랍, 프렌치, 영어를 섞어서 말해 사실 많은 부분을 못 알아 들었다.) 성당으로 올라가 기도를 드리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나에게는 무척이나 낯선 장소였고 의식이었지만, 생각보다 무겁거나 딱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넓게 트인 성전 안에 드문 드문 앉아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자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아마도 둘이 옆에 있어서였겠지만. 엄청 넓은 성전은 두층으로 나눠져 있고 이층은 중앙이 뚫려 아래층을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였는데, 밑 층은 남자들을 위한 공간이고 위 층은 여자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의 페낭에서 5개월이나 살았었지만 관광객에게 오픈된 이슬람 성전의 일부를 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성전에 들어와 보긴 처음이었다. 러시아나 유럽, 동남아를 돌아다니며 그렇게 많은 성당, 교회, 그리고 절에도 들어가 보고 의식에 참여해봤던 걸 생각하면 유난히 이슬람만 멀고 어렵게 생각하며 살지 않았나 싶다. 다 사람 사는 사회의 사람들이 믿는 종교인데 내게도 적잖은 편견이 있는 게 사실인 듯하다. 둘은 자신들은 여기서 금요일마다 봉사를 하는 대학생들이라며 원하면 또 와도 좋다며 내게 나이를 물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나를 언니처럼 챙겨주고 살펴주던 애들이 먼저 22살, 24살이라고 밝히며 내가 자신들의 또래일 걸 안다는 표정으로(진짜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내 느낌에) 나를 바라보자 나는
나는 28살이야
라고 말해버렸다(진실은 만으로도 서른이 넘음). ‘진짜? 그렇게 안보이는데. 학교는 졸업했어?’ ‘그럼, 여기 오기 전에 일도 했었어.’ 내가.. 왜 그랬을까? 나이는 부끄러운 것은 아닌데. 아마 나도 또래이고, 청춘이고 싶었나 보다(사실 스물 둘하고 스물 여덟도 갭이 크긴 하지만). 모스크 첫 방문에 거짓말을 남기고 돌아왔다. 둘하고 페이스북 친구도 맺고 사진도 여러 장 찍었는데 어쩌다가 둘이 진실을 알게 될 날이 올는지 걱정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시장에 들러 먹거리를 사고 처음으로 봐 뒀던 술을 파는 상점에 들렸다. 사실 나는 얼음이 가장 사고 싶었고 여기에 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내가 몸으로 말하는 얼음을 알아듣지 못해(얼음을 팔지 않는 것 일 수도 있고, 아직까지 말 못 하는 애가 와서 얼음 달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상상의 범위 밖일 수도 있고) 결국 사지 못하고 알제리 산 와인 한 병만 사가지고 돌아왔다(마트에서 파는 내가 구입한 알제리 와인은 500 디나르였는데, 맛이 괜찮았다). 불현 한국어나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외국인이 한국에 왔다면 그래서 길에서 아랍어와 불어만으로 도움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살기 어려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길에서 아랍어나 불어하는 사람 만나기는 하늘에 별 따기 일 텐데.
<표지 사진 : 오랑에 있는 그랜드 모스크 앞에서 찍은 사진.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이 자신들의 사진은 페이스북에 올리지 말라고 부탁해서 잘 나오진 않았지만 혼자 찍은 사진으로>
제가 묘사하는 알제리는 대부분 진실 검증이 되지 않은 채 개인적 경험과 추측에 의해 쓰였음을 밝힙니다. 즐겁게 읽으셔도 좋지만 제 글에 알제리를 어떤 곳이구나라고 단정하진 않으셨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