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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선물

이야기, 열넷

by 방자

오늘은 오랑의 마지막 날이다. 우리는 내일 낮, 기차로 알제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아점을 먹다 우리가 오늘은 지금 머물고 있는 숙소가 아닌 다른 곳을 찾아봐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꿀꺽~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퇴실을 위해 부지런히 청소를 마치고 거리로 나섰다. ‘어디로 가지?’ ‘나 어제 기차역 다녀오면서 호텔 봤어. 거기 가보자.’ 아직 알제리에 온 후, 일반 숙박 시설에서 자 본 적이 없지만 막상 밖으로 나와 찾으려고 보니 생각보다 <호텔>이라는 글자가 꽤 눈에 띄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5성급 호텔을 알고 있지만, 거긴 비쌀게 분명함으로 패스! 한 3000 ~ 4000 디나르(2~30달러) 정도면 적당할 거 같은데라는 생각을 가지고 지금 머무는 곳부터 기차역까지 가는 길에 있는 10군데 정도의 숙박 시설에 들려 빈방을 물어보았다. 생각 외로 방을 보여주는 곳이 많지 않아(이건 나의 추측이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동양인 커플이 돌아다니며 빈방을 찾았기 때문에 방을 볼 기회마저 없이 방이 다 찼다는 소리를 들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음) 딱 3군데를 볼 수 있었고, 그중 가장 비쌌지만 유일하게 냉장고도 있고, 화장실도 방 안에 있는 3성급 호텔에 머물기로 하고 다시 오겠단 말을 남긴 채 4500 디나르의 비용을 지불했다(다른 두 곳은 3200, 3500 디나르였으나 화장실이 밖에 있고 조명 등이 어둡거나, 침대가 부실했다. 전체적으로 시설이 좋지 않았다). 머물고 있는 곳에서 남은 재료들로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 가방을 짊어지고 숙소로 들어섰을 때는 벌써 오후 4시가 가까웠다. 5시에 그랜드 모스크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을 만나기로 약속을 한 터라 시간이 많지 않았다. 벌써 돈을 받은 호텔 주인아저씨는 우리를 보더니, '엇. 둘이 같이 잘 거야? 안 되는데.'(여기서부터 있는 아저씨와의 대화는 상황에 기반하여 추측한 의역임) 라며 2500 디나르를 더 내고 방하나를 더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왜요? 왜 안 되나요?' 그럼 비용이 7000 디나르가 되므로 절대 그 정도 시설에 그 정도 비용을 지불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설명을 요구했다. 아저씨가 둘이 가족이 나고 물으셔 그렇다고 하니(심적으로 가족임), 여권을 보시곤 성이 달라서 안된다고 하신다. 나는 비가 나의 남편이라고(또 거짓말함) 부부라고 이야기했지만, 근데 왜 성이 다르냐며 성이 다른 사람들을 한 방에 묵게 해 줄 수 없다고 하신다. '우리나라에선 결혼해도 성이 바뀌지 않아요.' '여긴, 알제리야. 한방에서 자는 건 뭐라고 않겠지만, 일단 성이 다르면 방은 두 개 얻어야 해.'라는 게 그분의 지론.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더니) 아마도 법이 그런 모양이다. 하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뭐, 딱히 별 수도 없다.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데, 다음 약속 시간 때문에 떠나고 자시고 할 시간도 없으므로. 어쩔 수 없는 우리는 봤던 방이 아닌 가장 저렴한 싱글 룸 2개(방 당 2500 디나르)에 머물기로 합의했다. 돈을 더 내고, 각자 다른 층의 다른 방 키를 얻어 방에 들어 선 나를 기다린 건, 스프링이 나간 허름한 침대 하나, 그 위에 찢어진 이불, 침침한 조명, 뚜껑 없는 변기, 전등에서 소리가 나는 음침한 샤워시설, 벽 곳곳에 즐비 모기들의 시체... 아까 본 방의 반의 반도 안 되는 (가격은 절반이 넘는데) 시설 수준. 하하하. 슬플 뿐이다.


그 방은 괜찮니?


30분 후 다시 만난 우리는 잠시 씁쓸함을 공유한 채 각자의 길을 나섰다. 비는 일을 하러 가고 나는 친구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홀로 그랜드 모스크로 가는 트램에 올랐다. 오늘이 세 번째 만남이자 나에게는 세 번째 모스크행이다. 어제가 금요일(기독교로 치면 주일)이라 둘이 봉사를 하는 시간에 맞춰 비와 함께 갔었고, 우리는 각자(남/여 씻는 곳과 기도하는 곳이 다름) 모스크에 있다가 예배 시작 직전에 돌아왔다. 나야 그 친구들이 챙겨주고 말도 통하는 편이니 괜찮지만, 그 넓고 낯선 곳에서 혼자 방황하는 그가 마음에 걸렸던 터이다. 하지만 새친구들 입장에서는 내가 일찍 돌아가는 게 아쉬웠는지 줄 게 있다며 오늘 다시 만나자고 했고 나도 흔쾌히 다시 오겠다고 했다(그래서 오늘은 혼자 옴). 모스크 앞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자니 그들이 방긋 웃으며 들어왔다. 세 번째 만남이라 그런지 친숙한 느낌이다. 노르(스물두 살, 더 어리고 적극적인 친구)가 내게 선물이 있다며, 새 히잡을 꺼내 씌어주었다. 파란색 히잡에 작은 구슬 브러지. 나는 내가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색이 이쁘다는 생각이 들었고, 둘은 내게 잘 어울린다며 히잡을 어떻게 쓰는지 알려줘야겠다고 했다.


기도하고 갈래?


'응' 나는 아마도 이게 알제리에서의 마지막 모스크 방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겠다고 했다. 노르는 자신은 오늘부터 며칠간 자신은 기도를 드릴 수 없다고 했다. 여성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약 일주일 정도 기도를 드릴 수 없는 기간이 있다며 장황하게 설명을 시작했지만, 나는 금방 알아들었다. 생리기간에는 기도를 하지 않나 보다. 그래서 처음으로 하디자의 시범으로 손발과 얼굴을 씻는 절차를 거쳐 성전에 들어섰다. 그녀를 따라 기도를 드렸다. 물론 뭐라고 하는지 모르지만 세 번째 따라 하다 보니 동작이 익어 내 나름의 기도를 올리며 따라 할 수 있었다. 두어 차례 절을 하고 의식의 마지막 오른쪽을 보고 앗살라말리쿰, 왼쪽을 보고 앗살라말리쿰(당신에게 평화를), 두 손을 모아 신의 뜻대로 하소서라며 기도를 마쳤다. 노르가 나를 앉혀놓고 기도의 뜻을 하나씩 설명해주려고 노력했다. 매우 한정된 단어를 썼으므로 이해에 한계가 있었지만, 나는 내 나름의 감과 경험으로 추측하고 그걸 다시 설명했는데, 둘은 내가 잘 알아듣는다며 좋아했다. 노르가 선물이라며 내게 들고 있던 봉투를 건넸다. 봉투 안에는 케이스가 있었고 그 안에 아랍어 코란이 들어있었다. '너를 위해서 영어 코란을 구하고 싶었는데, 구하지 못했어. 읽지 못하더라도 성스러운 책이니까 잘 간직해줘.' 그 표정, 그 진심, 그 분위기. 나는 고마웠지만 동시에 배낭의 무게가 두려워 옷 하나 살 때도 신중을 기하는 여행자 신분으로써 읽지도 못하는 언어로 쓰여진 케이스가 있는 책이 주어진 것에 대한 암담함을 느꼈다. 하지만 내 대답은, '너무 고마워~'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내게 코란은 손을 씻고 만져야 한다고 이야기해주었고, 이 책은 다른 종교서적들과는 달리 1400년간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책이라고 이야기했다. 이슬람에 대해서도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여행에 대해서도. 그들은 내가 종종 혼자 다니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내가 어렸을 때부터 혼자 여행을 하곤 했다니까 자신들이 모르는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믿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전쟁하는 중동의 사람들은 스스로가 이슬람이라고 칭하지만 진정한 이슬람은 아니라고 했고, 이슬람의 종교적 정통성과 전통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뭐가 옳다 그르다 말할 생각은 없지만 개신교 환경에서 자란 나로서는 그녀가 하는 이야기가(전혀 거짓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지만) 내가 아는 거랑 다르기 때문인지 순간 내가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아까 호텔 아저씨도 그렇고 비자 문제도 그렇고. 그래 맞아, 상식이 다르다. 마치 인도처럼. 아니 인도 이상으로. 근데 흥미롭게 인도에서 초반에 경험했던 수많은 불쾌함들을 여기서 하나도 경험하지 않는 건, 운이 좋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만난 사람들이 대부분 어린 왕자에 나오는 <램프를 켜는 사람>과 비슷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노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릿속으로는 막 이런저런 생각들이 지나감). 그가 이야기하는 게 조금 이상하고 비합리적이라고 느껴지더라도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구와 살아야 한다면 <램프를 켜는 사람>과 살고 싶다던 어린 왕자처럼. 나도, 그 신실함과 성실함에 때문에 그녀들이 내가 아는 것과 다른 것을 말하더라도 싫지 않고 의미 있고 아름답다고 느낀 것 같다. 헤어지기 전 하디자가 볼뽀뽀를 하며 '노르, 하디자. 기억해줘.'라고 했고, 노르는 '너를 만난 건 내 삶에 평생 동안 기억될 일이야'라고 했다. 괜스레 눈물이 핑 돌았다. 어쩜, 이들이 원하는 것처럼 내가 여기 좀 더 머물면 그들과 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일 떠나는 게 맞을까?


돌아오는 길, 트램에서 중앙 자리에 앉아있는 젊은 여성들이, 중년의 여성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다시 그녀가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서로 미소를 주고받으며 모여있는 것을 보았다. 이슬람 국가의 여성 사회. 내가 쉽지 않을 거라고 막연하게 상상하는 그곳에 우정을 쓸쩍 곁눈질하며, 만약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저 굴에 풍덩 뛰어들 용기를 가진 사람일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런 큰 선물(코란 말고 진실한 마음에서 느껴지는 감동)을 받았으니, 코란은 그 증표로 무겁더라도 잘 모시고 가야겠다. 한국까지.


<표지 사진 : 그랜드 모스크에서 찍은 노르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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