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열다섯
밤새 잠을 설쳤다. 완전히 닫히지 않는 창문 사이로 모기들이 들어왔고,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아 제대로 샤워를 하지 못한 채 더위에 방치돼 삐질삐질 땀을 흘리는 나를 무참히 물어뜯었다. 게다가 스프링이 나간 침대 때문에 어떻게 누워도 허리가 아파 결국 얇고 긴 베개 위에 더위 먹은 북극곰처럼 간신히 몸을 걸치고 늘어져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아침은 왔지만 휴식하지 못한 나는 지쳐서 새로운 시작의 준비가 되질 않았다. 비도 모기에 뜯기다 자는 걸 포기하고 밤새 일을 했는지 만나기로 한 오전 10시가 다 되어서 ‘나 30분만 잘게. 갑자기 너무 졸리다.’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11시가 다되어서야 숙소를 나와 기차역으로 향한다. 차마, 잘 머물다 간다는 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만약, 알제리의 호텔들이 다 이렇다면(설마 그렇겠냐만은) 나는 다시는 호텔에서 자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기차역 가는 길, 커다란 배낭을 메고 가는 우리를 보고 종종 눈인사를 했던 사람들이 잘 가라는 듯이 배웅해 준다. '오랑, 안녕! 잘 있어~' 나는 괜스레 누군가를 떠나는 양 맘이 그렇다. 노르가 조심히 가고, 도착하면 알려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는 내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늘 기도해주겠다고 했다. 적게나마 마음의 안정을 얻고 힘을 낸다.
붐비는 기차역에서 여러 명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12시 반에 출발하는 알제행 1등 칸 티켓 두 매를 구입했다(인당 1200 디나르). 8개월 넘게 돌아다니면서 꽤 여러 번 기차를 탔지만 1등 칸 티켓을 사 보긴 처음이다. 사람들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권장한 1등 칸 티켓에는 좌석 표시가 없었다. 기차에 올라보니 1등 칸과 2등캉은 꽤 큰 차이가 있었는데, 1등 칸은 나름 편안한 1인용 의자라면 2등 칸은 옛날 마을버스처럼 2인용 좌석이 구분 없이 붙어있는 긴 의자였다. 우리는 2등 칸 가격을 몰랐지만(그것까지 물어볼 언어적 역량이 안되어 포기함), 그냥 절대적으로 봤을 때 우리에게 이 가격이면 썩 괜찮은 거래라고 느꼈고, 앞으로 알제리에서 1등 칸 기차만 타고 여행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으니 콘스탄틴도 사막도 다 기차를 타고 다녀오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나누며 흡족해했다(호텔에 비하여 차리리 잠자기도 좋겠다고 생각함). 그 만족도 잠깐, 막상 기차가 출발하고 보니 기차의 치명적 단점이 드러났는데, 에어컨이 없는 이 기차에 양쪽으로 열린 작은 문 틈으로 모래 먼지가 시시 때때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콜록, 콜록, 콜록.
사람들이 기침을 하며 얼굴을 가린다. 히잡이 꽤 유용해 보여 나도 어제 선물 받은 히잡을 꺼내 얼굴을 둘러쌓다. 히잡 쓴 아주머니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내 행동을 관찰하는 것을 느꼈다. 혹시,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창문 몇 개를 닫았더니 덥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니 까만 먼지가 그대로 묻어난다. 허허. 기차여행은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그래도 바깥 풍경은 멋있다.
나름 책도 읽고, 잠도 자고, 옆 좌석 사람들이 나눠 준 과자도 먹고, 가끔씩 아이스박스를 들고 나타나는 아저씨에게 아이스크림, 민트차 등도 사 먹으며 장거리 여행 끝에 알제에 도착했다. 기차 탈 때, 도착하는 시간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어 막연히 4~5시간 정도 걸리지 않을까 했는데 도착하니 벌써 6시 반이다(6시간 걸림). 비가 Airbnb를 통해 예약한 숙소의 호스트인 브라이언이 자신이 6시 반에다 집에 돌아올 거 같다고 그 이후에 오라고 메시지를 보냈으니, 우리는 어디서 지체할 것도 없이 부지런히 집만 찾아가면 된다. 가는 길, 가볍게 저녁을 먹고 집을 찾아 나섰지만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고 고생을 했다. 구글 맵에서 표시된 곳에 집이 없어서였는데,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길을 묻고, 물어서도 쉬이 찾지 못한 그 집을 브라이언이 보낸 메시지의 단서들을 조합해 찾으니, 바로 아까 내린 그 역 앞이다. 15kg의 배낭을 메고 두 시간 가까이 헤매다 기진맥진해진 상태에서 엘리베이터도 없는 6층 건물에 올라서니 다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브라이언이 반갑게 우리를 맞는다. '계단을 오르느라 힘들었지?’ ‘아뇨, 계단이 문제가 아니었어요. 엄청 헤매었거든요.” Airbnb에 스스로를 편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던 50대 중반의 영국인 브라이언은 함박 미소와 유쾌한 어투로 머물 공간을 하나씩 소개해준다. 작지만 책상이 있는 방, 거실, 화장실, 세면실, 부엌. 그리고, "냉장고에 있는 건 맘껏 먹어도 돼. 난 아침 7시 반에 출근하고 저녁 7시가 넘어서 들어오니 네 집처럼 지내렴. 알제는 좀 아니?” 이 정도면 매우 훌륭하다. 그도 훌륭하다. 알제에 3년 정도 살았다고 한 그는 스스로를 아키텍처라고 소개했는데 (구체적으로 뭐하는지는 안 물어봄) 집 곳곳에 뭔가 만들기를 좋아하는 흔적(스스로 만든 조명, 수납, 문구 등)이 보였다. 꼬질꼬질해져서 스스로 냄새가 날까 걱정이 된 나는 빨리 씻고 싶었지만, 일단 그로부터 시원한 물 한잔을 받아 들고 바람 부는 테라스 의자에 앉았더니 이야기 꽃이 핀다. 그는 우리에게 알제에서 가볼 만한 곳들을 소개해 주었다. 사실 이미 3박을 한 상태였지만, 그가 가봤냐고 물은 곳 중 가본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비와 내일은 브라이언이 이야기한 공원에 가기로 하고 씻자마자 잠이 들었다. 역시, 여행에서 가장 험난한 일은 이동인 것 같다.
<표지 사진 : 알제 가는 길, 기차 안에서 바라 본 바깥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