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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역사에 관한
주워들은 이야기들

이야기, 열아홉

by 방자

콘스탄틴은 아주 오래전 고원 위에 세워진 역사 깊은 도시이다. 여러 제국이 이 곳에 머물다 갔으므로 그 역사가 누구의 역사라 딱 꼬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이 땅에는 기원전부터 사람이 살았고 무수한 침략과 방어를 거듭해가며 도시를 발전시켰다. 지난 사흘 하루 중 몇 시간씩은 도시를 둘러보는데 썼다. 몇가지 인상깊었던 곳들에 대해 언급해보려고 한다.


가장 먼저 접한 콘스탄틴의 역사는 구시가지 중심가에 있는 베이 궁(Palais du bey)이다. 궁이라고 하기엔 작아 보이는 출입구로 들어서니 몇몇 사람들이 보인다. 표를 끊어 준 직원(입장료 80 디나르)은 우리에게 영어를 하는 가이드를 붙여주었다. 가이드는 20대 초반쯤 되어 보였는데, 궁의 역사와 구조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사실 전반적으로는 궁 혹은 박물관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좀 지저분하고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 강했는데 그건 어쩜 알제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현실에서 훌륭한 가이드의 역할이 최선의 선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궁은 프랑스 식민 전 알제리가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산하에 있을 때 이 지역의 마지막 베이(지방의 수장. 알제리는 그때 동/중앙/서의 3개의 지방으로 나뉘어 있었고, 터키인의 피가 흐르는 3명의 베이가 있었다고 함)에 의해 1800년대 초반에 지어졌다고 한다. 몇 년간 베이의 궁으로 쓰이던 이곳을 그 후 프랑스군이 점령하면서 약간 증축되었고, 주요 행정시설로 쭉 쓰이다 프랑스 식민이 끝나고 한동안 버려져 있던 것을 1990년에 대 들어 폴란드 사람들에 의해 복원 공사를 진행하다 경비 문제로 중단되었고 2000대 초반에 지금의 박물관 기능으로 개관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에게 흥미로웠던 것은 상당히 유럽 등지의 다양한 나라에서 건너온 하단 벽타일(각 나라의 성향을 잘 나타내고 있었음)과 베이가 여행한 곳을 그림으로 그려 장식했다는 상단 벽화였다. 상단 변화는 상당 부분 그림이 지워져 알아볼 수 없는 게 많았지만, 남아있는 것 중에는 인상 깊은 여행지(예를 들어, 터키의 소피아 성당, 그리스의 아테네 같은)를 표현한 독특한 벽화를 통해 그가 엄청 여행을 좋아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또한 제각기 다른 대리석 기둥과 크기, 사이즈, 모양도 제각각인 문들도 흥미로웠는데 아마도 그는 통일성, 단순성보다는 다양성의 미를 중시하는 사람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낙후가 눈에 띄게 진행된 현재의 모습으로는 아름답다 말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만, 설명과 옛 사진, 흔적 만으로 화려했던 시절의 이곳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는데 진심으로 건물과 역사가 잘 복원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더 미셸은 우리와 또 다른 2명의 프랑스에서 오신 손님을 데리고 콘스탄틴 야경 구경을 시켜주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Monument aux Morts (2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한 위령 비문 같은 곳)이었는데, 가는 길 구불구불한 Rhumel 강을 끼고 깎아지른 듯한 언덕의 타고 만든 길과 두 개의 언덕을 이은 오래된 다리의 인상적인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저기에 길을 만들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그길은 프랑스 식민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도착한 위령비에는 밤마실 나온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거기서 보는 시내 전경이 또 일품이다. 파더 미셸은 위령비에 쓰여 있는 이름들 중 일부는 (무하메드 같은) 아랍계 이름이고, 다른 일부는 (사무엘 같은) 가톨릭 혹은 유대인 이름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나는 유대인 이름이 꽤 많이 있는 게 흥미로워 지금도 그들이 여기 사는지 물어보았는데, 그의 말로는 프랑스 식민 전부터 이곳에는 유대인들이 꽤 있었는데, 프랑스 식민시절 프랑스는 그들에게 국적 전환 및 개종을 요구해서 대부분 프랑스인 되었고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알제리가 독립하면서 대부분 프랑스인들과 함께 쫓겨나 더 이상 이 땅에 남아 있는 유대인은 없을 거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예약해 둔 택시를 타고(왕복 2000 디나르를 지불함) 콘스탄틴 근교의 로마 유적지, Tiddis를 방문했다. 콘스탄틴 시내에서 차로 3~40분 정도 Rhumel강을 따라가면 나오는 이곳은 로마시대에 마을로 콘스탄틴처럼 언덕 위에 지어진 동네이다(방어적 측면에서는 콘스탄틴이 훨씬 나아 보임). 파더 미셸에게 근교에 로마 유적지가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가 괜찮은지 추천해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Tiddis와 Djemila를 추천해주었는데, 검색해 보니 Tiddis는 가깝고 사람들의 방문이 적은 작은 마을이고, Djemila는 로마 유적지 중에서도 큰 편에 속하는 Unesco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었다. 하지만 Djemilla는 편도 2시간 가까이 이동해야 하므로 우리는 가까운 Tiddis로 가기로 했다. 그곳에서도 아저씨 가이드 한분이 우리와 동행하며 설명을 해 주셨는데, 그분은 영어를, 우리는 불어나 아랍어를 전혀 못하는 관계로 순수하게 바디랭귀지와 추측으로만 소통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나름 요리하는 곳, 도살하는 곳, 씻는 곳, 자는 곳, 동네 수령이 살 던 곳, 물을 저장하는 곳, 게임 판 등.. 삶의 전반 활동이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들었다고 생각한다. 마을로 들어가는 아치와 길을 비롯해 꽤 도시의 많은 부분 잘 남아있었는데(동물이나 수령의 얼굴 모양의 돌에 새긴 조각도 있었음), 비는 이렇게 천년이 넘은 거주지가 잘 보전될 수 있었던 아마도 건조하고 눈, 비가 거의 없는 날씨 덕분일 거 같다고 했다. 나는 예전에도 이 곳의 날씨가 이랬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물론 외각의 언덕배기에서는 바람이 불고 시원함이 느껴졌지만 대체적으로 건조하고 햇살이 강했기 때문에 삶이 팍팍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동네 여기저기에 목욕시설을 비롯한 물을 저장하는 곳이 많았다. 그게 물이 풍부해서 많았던 것인지 부족해서 되는대로 최대한 보관하고자 많았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시절 이 곳 사람들의 삶이 어땠을지 차마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상상력을 펼치기가 쉽지는 않지만 Tiddis의 방문은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것저것을 보고 들으며 점점 콘스탄틴과 알제리의 역사가 궁금해져서 말이 통하는 사람마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물어보고 다녔다. 그렇게 주워들은 것을 대략적으로 나열해보자면 기원전 이 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베르베르(berber. 인종적으로 백인에 가까움)인으로 현재의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아 등 북아프리카 등지에 살았으나 고대 페니키아가 쳐들어 오면서 대부분 사하라(사막)나 산간 지역으로 쫓겨났고, 그 후 로마제국이 지중해 지역을 장악하며 더 설 곳을 잃었고,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동로마(비잔티움)에 의해 점령당했었으며(이때까지는 종교적으로 기독교 문화), 그 후 아랍계 사람들이 대거 들어오면서(중동 사람들) 한동안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으며(이슬람 문화. 이때부터 유대인들도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함), 프랑스의 점령과 함께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이 섞이게 되었으나 1962년 독립 후 인종적으로는 아랍계, 종교적으로는 모슬렘이 주가 되고(하지만 여전히 베르베르인도, 프랑스계 외국인들도, 기타 외국인도 함께 살고 있음) 현재는 자원적으로는 부곡(석유 등)이라 할 수 있으나 산업은 발전하지 못했고, 기본 인프라는 대부분 프랑스 식민시대의 것(건물, 교통 등)으로 프랑스 양식이 흔하며, 언어적으로는 아랍어를 1 언어, 프랑스어를 2 언어로 쓰고 있다고 한다(대학에서 공과계열의 많은 교육이 프랑스어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다수의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종교를 묻고 이슬람이면 형제/자매 아니면 타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며(현재 인구의 90프로 이상이 모슬렘이며, 모슬렘은 모슬렘끼리만 결혼하기 때문에 타 종교일 경우 삶 전반에 어려움이 있다고 함. 현재 알제리의 타 종교 시설은 등은 대부분 외국인을 위한 시설인 듯함),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도 적잖이 있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중앙 및 남아프리카에서 넘어온 난민들이 있어서 인 것 같은데, 알제리 사람들은 스스로를 아프리카라고 칭하기보다는 지중해 국가라고 칭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정보 습득 과정을 통해 콘스탄틴과 알제리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는데, 사실 북아프리카 지역은 내가 생각하던 아프리카와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고, 그들 스스로도 아프리카라는 호칭이나 정체성을 거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 역사적으로 지배보다는 늘 피지배층의 지역이었음에도 유럽과 중동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인 것 같다.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지중해라는 바다와 사하라라는 바다. 이렇게 두 개의 큰 바다가 있는데, 아무래도 모래 바다가 물바다보다 건너기 어려운 바다인 것 같다고. 알제리만 보고는 아프리카를 봤다고 말할 수 없음은 분명한 것 같다.


<표지 사진 : Tiddis에서 바라 본 풍경. 끊임없는 벌판 가운데 있는 듯 하나 반대쪽 언덕 너머에는 나무가 있는 높은 언덕과 강이 흐르고 있음>


위의 이야기는 주워들은 이야기를 기반으로 검증 없이 나열하였으므로 정확성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저 알제리에서 방황하다 보면 저런 이야기를 주워듣게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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