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서른
아침, 부산하게 청소를 시작했다. 이불커버와 수건 등을 모아 빨고, 바닥을 쓸고, 쓰레기를 정리한다. 이 허름하고 작은 주방, 단출한 침대, 낡은 가구들이 전혀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나는 머잖아 이곳이 그리울 것 만 같다. 냉장고에 남은 음식들을 싹싹 모아 둘이 아점을 만들어 먹었다. 반통 남은 멜론과 반쪽 남은 레몬은 카르멘에게 꼭 처리하라고 말하고 가야지. 1시 반, 카르멘에게 인사를 건네고 성당 숙소를 나선다(왠지 이것이 그녀와의 이별이 아니라 동알제리 추억 전체와의 이별 같다는 생각이 들어 먹먹하다). 기차역 가는 길 카페나 문 연 가게를 찾아보지만 역시나 없다.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는 축제(이드) 공휴일이다. 새삼 다가오는 추석에도 문 연 가게를 찾기 쉬운 한국이 얼마나 좋은 나라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가진 간식이라곤 디기다 8알. 심지어 물도 없는데 3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 건가? 지난번처럼 기차 안에 차나 물, 아이스크림 등 간식 파는 사람이 돌아다니길 기대해본다.
베자야에서 알제행 기차는 오란에서 알제, 알제에서 콘스탄틴 가는 기차와는 다르다. 정확하게 말하면 훨씬 신식이다(심지어 지정석). 엊그제 이멘과 함께 와서 기차표를 살 때, 1등 칸을 사고 싶다고 말했지만 1등 칸 같은 건 없다는 말을 듣고 절망했었는데(그 기차들의 2등 칸은 우리나라 마을버스처럼 2인이 기다랗고 딱딱한 의자에 함께 앉아야 하는 구조였다) 기차를 보니 그 기차들의 1등 칸 못지않다. 아니 좌석 앞에 테이블이 있고, 창문이 완전 밀폐라는 사실에서는 훨씬 낫다(한국에서는 당연한 건데 기차 보고 매우 감탄함). 우리는 먼지의 괴로움 따윈 없이 책을 펴고 음악을 들으며 쾌적한 여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신식 기차 내에는 매점이나 간식을 파는 사람이 없다. 기차는 생각보다 많이 늦어져 예정했던 5시 반이 아닌(3시간 걸린다고 들음) 7시(4시간 반 걸림)가 다 되어서야 알제에 도착했다. 문제는 6시에 완님을 만나기로 했는데, 기차 연착으로 우리를 오래 기다리신 데다가 심지어 역에서도 서로 헤매 한참 후에나 만나면서 시간이 촉박해졌다. 게다가 6시 반쯤 연락하겠다고 한 Airbnb 호스트에게도 연락이 늦어졌다(완님을 만나 저녁을 먹고 숙소로 이동하거나 아니면 숙소에 짐을 풀고 나와 함께 저녁을 먹거나 할 예정이었으나 호스트에게 연락 후 급히 숙소로 이동했고 완님은 바로 가셔야만 했다). 지난번 머물렀던 영국인 아키텍처 브라이언 아저씨네 집에 머물고 싶었지만(역에서 매우 가깝고, 아저씨가 친절하여) 하루 전 숙박 예약을 진행하면서 남은 숙소가 많지 않아(그 집도 벌써 예약되고 없음) 우리의 예산보다 훨씬 높은 1박 6만 원대의 집을 예약하게 되었는데(그래도 방하나가 아니라 집 전체라 가치 있다고 여기면서), 우리가 도착한 곳은 한국으로 치면 아파트 단지라 할 수 있을 만한 5층 빌라 건물이 즐비한 단지였다. 어렵사리(완님이 사람들에게 많이 물어가며) 찾은 우리 숙소 앞에서 호스트 아민과 인사를 하고 5층 계단을 열심히 올라 꼭대기 층의 플랫에 다 달았다. 방 두 개, 거실, 부엌으로 구성된 이 집은 알제리에서 처음 보는 많은 것이 갖춰진 집이다(이게 다 우리 둘이서 쓸 수 있는 건가. 두근두근하다). 흥미로운 것은 밖에서 집 안까지 들어오기 위해 다섯 개의 키가 필요하다는 (잠금장치가 5개나 있음) 것이다. 아민은 간략하게 집을 소개하고 키를 주고 떠났다. 완님도 가봐 한다고 하셔서 아쉽지만 배웅으로 작별인사를 했다(이분께도 신세만 지고 가는).
우리는 둘만 남았다. 아민이 키를 다섯 개나 줘서 뭐가 뭔지 찾지 못해 문을 하나도 못 잠그고 나온 터라 나는 부지런히 올라가 보려 했지만 비는 배가 고프다며 마트를 찾아보자고 한다. 마트? 나는 이런 곳(외곽의 아파트 단지), 이런 날(공휴일), 이런 시간(저녁 9시가 다됨)에 문을 연 마트가 있을 거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만 생각해보니 아점 이후 우리가 먹은 거라곤 디기다 4알씩 밖에 없다. 아무리 디기다가 2알만으로 사막을 건널 수도 있다는 소문이 있다고 해도 대추알 만한거 네 알로 6시간 넘게 버틴 이 장정이 배가 고프지 않을 리 없다. 나도 사실 배가 고프다(하지만 저녁 먹을 생각은 일찍이 포기함). '우리 먹을 거 하나도 없지?' '아, 아니다. 너 가방에 팝콘 두 개 들어있어. 내가 독일에서 산거.' '그리고, 그 100ml짜리 브랜디도 있잖아. 먹을 거 못 찾으면 우리 그거 먹자.' 나는 혼자 자문자답하며 가방 속에서(밖에 희망이 없을 것 같단 생각에) 희망을 찾는다. 그는 '그거 우리 축하할 일 생기면 마시자고 한 거잖아.'라고 내 희망에 찬물을 끼었는다. 배고픈데 먹을 걸 생각해내서 굶지 않는 게 축하할 일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린 숙소 문을 열어둔 채 밤거리를 헤매기 시작했다.
꽤 걸어 단지 밖으로 나오니 불 켜진 ICI-FLEXY 사인이 보였다. 안을 들여다보니 핸드폰 케이스 사이로 초콜릿이 보인다. '초콜릿이라도 사 먹을까?'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물 마시는 시늉을 하며 혹시 물도 파는지를 묻는다. 물론 없을 줄 알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는데, 웬걸 그는 밖으로 나가서 우측, 좌측, 우측으로 가다 보면 문 연 마트가 나올 거라는 시늉을 한다. 다시 또 걷는다. 근처의 모스크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는 알제의 으슥한 밤거리. 우리는 마트를 찾았다. 마트의 불빛은 모스크의 불빛보다 아름답다. 작은 구멍가게이지만 있을 건 다 있다. 물, 콜라, 주스(목말라서 음료 사재기), 요플레, 피클, 파스타면, 토마토 페이스트, 아저씨가 아시아 면이라고 한 작은 동남아 누들 두 개를 샀다. 올레~ 먹을 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니 한층 더 우리만의 공간이 좋게 느껴진다. 누들, 피클, 팝콘, 브랜디, 콜라로 저녁을 먹었다. 딱 보아하니 우리가 여기서 시내로 나가는 건 쉽지 않을 듯하다. 이틀 푹 쉬고 알제리를 떠나야지! 오랜만에 만나는 (심리적으로) 커다란 더블 침대에서 굿 나잇!
<표지 사진 : 베자야 가는 기차, 훌륭한 2등 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