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라 말하기엔 시원 섭섭한,

이야기, 셋

by 방자

비가 내린다. 어젯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줄기가 얇아져 이제 거의 보슬비 수준이지만 그래도 비는 이동을 앞둔 여행자에게 가장 어려운 존재이다. 아침 9시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맡겨둔 채 혼자 길로 나섰다. 숙소 앞 시장통의 상점들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길에는 짜이나 도사 같은 가벼운 아침 요깃거리를 파는 사람들,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어제의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 가게를 청소하고 문을 여는 사람들, 기도하는 사람들, 그리고 길에 사는 사람들이 어우러져 아침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지붕 위를 부지런히 걷고 있는 원숭이 한 마리를 보았다. 이번 인도 여행에서 처음 보는 원숭이이다. 이런 도심 한가운데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비도 오는데 어디를 가려 저리 분주한 걸까? 나는 한참을 서서 원숭이의 움직임을 쳐다보고 있었다. 전깃줄을 타고 위태롭게 건물을 오르고 건물 사이를 건넌다. 홀딱 젖은 모습이다. 나의 얇은 비옷도 어느새 홀딱 젖어 팔뚝에 물기가 느껴졌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더니.. 나도 다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내가 가려던 가게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상가 앞에서 불을 펴고 옷을 말리는 여럿의 여자 난민들이 눈에 띈다. 주변에서 쓰레기와 나무 조각을 모아 피운 작은 불에 치맛자락을 들고 옷을 말리며 해맑게 웃는 그 모습이 눈에 박힌다. 비가 오는 거리에서 작은 처마에 기대 불을 쪼이며 젓은 옷을 말리는 그 형편의 서글픔이 내게 밀려오지만 깔깔거림과 미소를 보며 나도 모르게 뜨거운 미소가 지어진다. 마치 내가 그들의 느낌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이. 어쭙잖게 나는 인도에 온 이래 맨날 찬물로 주춤거리며 어설게 씻다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느낀 그 행복감을 생각해 낸다. 맨날 따뜻한 물에, 샤워기로 샤워를 하는 나날을 보낼 땐 결코 느끼지 못했던... 그 순간의 소중함.


지난 사흘 동안 벵갈루루에 있으면서 한 도시 속 두 개의 세상을 본 것만 같다. 어쩌면 내가 두 개의 얼굴로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남지 않은 현금을 아껴 쓰느라 음료수도 마시지 못한 채, 현지 사람들보다 더 검소하고 팍팍하게 채 천원이 안 되는 돈으로 끼니를 때우고, 매연 가득한 거리에서 걸어 다녀야 하는 하나의 세상과 신용카드를 쓸 수 있어서 가격 민감성이 낮아지는 쇼핑몰 안의 스타벅스와 술을 파는 레스토랑들이 즐비한 내게 퍽 익숙한 또 하나의 세상. 나는 내게 익숙한 그 세상이 인도에 있는 것이 반갑지만 낯설다. 2년 전 인도에 왔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생각해보면 자본주의 시대에 10억의 인구가 사는, 외국인들과 외국인 투자가 많은 나라에 쇼핑몰과 프랜차이즈 레스토랑, 카페 하나 없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인데 시골만 돌던 2년 전 여행에서 한 번도 접한 적이 없어 멋대로 인도는 어떤(아마도 내가 속한 세상과는 다른) 나라다 라는 관념을 머리에 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쇼핑몰 안에서만 지낸다면, 현금이 없더라도 어쩌면 큰 불편 없이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도에서 그런 여행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인도를 떠나기로 했다.


벵갈루루에 도착한 이래, 시티은행에서 돈을 찾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과제였다. 다른 모든 것들을 부과적인 것으로 치부한 채, 열심히 벵갈루루에 소재한 시티은행 여러 지점과 ATM기를 찾아다녔으나 인출 가능한 시티은행 ATM은 하나도 찾지 못했다. 대부분 NO MONEY, NO CASH, OUT OF ORDER라는 사인이 붙어있어 서운함을 자아냈지만, 혹여 사인이 붙어 있지 않는 기기를 만나기라도 할 때면, 돈도 안 나오는데 몇 번이나 카드를 집어넣고 시도를 해보는 미련을 떨기도 했다. 가끔씩 만나는 긴 줄의 인출이 가능한 타행 ATM기는 한결같이 2,000루피가 회당 인출한도였으며 최소 10분, 최대 30분 이상을 기다려야 인출을 할 수 있을 만큼 줄이 늘어서 있다. 인출을 하면서 인도는 물가가 싸니까 그냥 매번 7,000천 원가량의 수수료를 인출액에 포함시켜 2000루피가 한화 35,000원이 아닌, 42,000원이라고 치부해버릴까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어차피 현지 식당에서 우리가 적절한 한 끼를 먹는 가격은 2~300루피 정도면 충분함으로 그래도 한국인인 우리 입장에서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이다. 근데, 뭔가 배알이 꼴리고 짜증이 난다. 받은 서비스도 없는데, 서비스 차지를 30%나 붙여 나온 식당 영수증을 받았을 때의 기분처럼. 그래서 우린 어젯밤 늦게 스리랑카행 비행기 표를 샀다. 오늘 저녁 스리랑카로 떠난다. 가보고 싶었던 마이솔(Mysore)에 못 간 것이 못내 아쉽지만, 현금이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더 열악하게 살며 은행 앞을 맴돌며 보낸 인도에서의 시간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시원하기도 하다. 굿바이, 인디아.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올게~ 나는 아직 네가 궁금하다.


<2016.12.13. 인도의 마지막날이 되버린 아침, 벵갈루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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