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어야 한다.

2021 미얀마 민주화 운동

by 윤소정
미얀마 군부의 총격에 숨진 일곱살 킨 묘 칫.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감춰진 거짓을 풀어내기 위해
내가 가진 것은 목소리뿐이다
거리의 관능적인 남자의
머릿속에 있는 로맨틱한 거짓말
하늘을 움켜쥐려는
권위의 거짓말
국가라는 것은 없다
그리고 아무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시민이든 경찰이든
굶주림 앞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어야 한다

위스턴 휴 오든 <1939 9월 1일>


2021년 2월 19일, 설 명절이 지나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조금 완화된 때의 일이다. 나와 가족들은 남편의 부모님이 사는 도시로 가기 위해 차로 4시간 반을 달렸다. 아침 일찍 출발하자, 전날 남편과 나는 몇 번이나 서로의 다짐을 확인했지만 아이들 아침을 챙겨 먹이고 뒷정리를 하고 보니 어느새 오전 9시 30분.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을 훌쩍 넘어있었다. 허기와 반가움을 허겁지겁 채우고, 둘러앉아 차를 한 잔 마셨다.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낯가림을 벗고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할 즈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리로 나섰다. 무언가를 사기 위해서 나선 길이었는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크게 한 번 숨을 고르고는 잠깐의 자유시간을 어떻게 쓸까, 짐짓 들뜬 고민을 했다.

그때 생각이 났다. 클럽하우스. 호기심과 거부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클럽하우스에 접속해보기로 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우뚝 섰다. 분명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겨울의 세상이었는데 지금 이곳은 봄의 세상이다. 스케줄 탭을 누르고 빠르게 스크롤을 하다가 ‘Poem’이라고 쓰인 제목을 보고 얼른 입장했다. 어느 악기의 섬세한 떨림을 연상케 하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거부감을 누그러뜨렸다. 사회자는 낭독회의 진행방식을 간략하게 설명하고는 첫 번째 낭독자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 걸음을 옮기며 귀를 기울였다.


“I love you. You are the love of mine. Your bosom, your voice…” 흡사 랩에 가까운 낭독을 들으며 웃었다. 강한 악센트와 한 몸이 된 움직임, 그 몸이 담긴 방을 상상했다. 낭독에 대한 패널들의 코멘트를 들으며 또 웃었다. 칭찬의 안테나를 높이 세운 각국의 친절한 마음, 다정한 마음들 때문이었다.


사회자는 얇은 막으로 된 타악기를 두드리듯 이번에도 조심스럽게 다음 낭독자인 M을 호명했다. “Yes...” 사회자의 그것보다 더욱 작고 섬세한 앳된 떨림이 답했다. 사회자는 먼저 M의 언어로 시를 낭독해달라고 부탁했다. M은 높은 나무 위에 앉은 작은 새처럼 지저귀었다. 나는 의미를 알지 못하는 단어들이 소리가 되고 노래가 되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차가 많이 다니는 대로변을 벗어나 작은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슬렁 걸었다.


모국의 언어로 낭독을 마친 M은 영어로 낭독을 요청받았다. 그런데 M은 한 문장을 다 끝내지 못하고 멈추었다. 너무 떨려서 그러는데 잠시 뒤에 해도 되겠냐고, M은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사과를 했다. 왜 그랬을까? 영어가 익숙하지 않아서였을까? 너도 알잖아. 저 안쪽에 깊숙이 자리 잡은 그 무언가를 꺼내는 일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맞다, 맞아. 이어지는 낭독을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상념 속을 헤맸다.


“M, 지금 괜찮겠어요? 아니면 조금 더 기다릴까요?”사회자가 물었다. “괜찮아요. 지금 할게요.” 아까보다 더욱 떨리는 목소리로 M이 답했다. “언제까지 형제들의 얼굴에 총부리를 겨누고 싸울 건가요?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려야… 얼마나 더…" 의미를 찾은 단어들은 흐느낌이 되고 눈물이 되었다. 나는 울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난 후에야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군경에 의해 무분별한 폭력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구나 했다. 그래서 그랬구나 했다. 곧 괜찮아지겠지, 곧 괜찮아질 거야. 무책임한 낙관을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다. 하지만 미얀마의 상황은 괜찮아지지 않았다. 나빠지기만 했다. 정확히 집계되지 않는 사망자 수는 수백을 훌쩍 넘었고, 군경은 어린이를 비롯한 민간인까지 잔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어야 한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어야 한다.’

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위스턴 휴 오든의 말을 떠올린다. 난 당대의 참혹함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암담한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은 무엇일까? 내가 낼 수 있는 목소리는 무엇일까? 또다시 막막한 물음 앞에서 섰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의 옆에 앉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