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꾸려 내려와 늦은 아침을 먹고 말끔히 치워진 식당 테이블에 다시 앉았어. 하얀 종이와 연필 앞에서 지난밤의 산책을 떠올렸어. 새까만 밤, 눈을 감은 건지 뜬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아 꿈벅꿈벅하던 밤. 벗은 발 발바닥으로 전해지던 오돌토돌한 아스팔트의 감촉과 어서 돌아가고 싶다고 칭얼대는 아이들의 소리와 그걸 어르는 가만가만 목소리와 그 모든 것을 꿀꺽 삼킨 까만색을 떠올렸어.
허공에 매달려 기억을 더듬다가 선생님을 봤어. 선생님은 차호에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붓고 있었어. 우려진 차를 공도배에 천천히 따르고, 세 개의 각기 다른 모양의 통에 오렌지 주스를 붓고, 시럽을 넣고, 얼음을 넣고, 뜨거운 홍차를 붓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금세 딴 애플 민트를 띄우는 선생님의 모습을 나는 지켜보았어.
기차역까지는 버스로 1시간 10분. 버스에 오르는 아이들과 내 손에는 떼오 오랑쥬가 든 병이 하나씩 들려있었어. 아니다, 내 손에는 하나가 더 있었다. 투명한 셀로판지 포켓. 반듯하게 접힌 두 장의 티슈가 든 정성 가득한 포켓. 건너편에 자리 하나씩 차지하고 앉은 아이들은 버스가 덜컹거리면서 가는 게 재밌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것처럼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꼭 잡은 채로 작은 탄성을 터뜨렸어. 다른 한 손에 든 떼오 오랑쥬도 잊지 않고 마셔가면서. 그 모습이 신기하고, 기특하고, 허전하고, 홀가분하고. 한 뼘, 한 뼘 아이들과 나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상상해보게도 되었어.
그러는 사이, 투명한 셀로판지 포켓 안에 새까만 밤이 담기고, 오렌지와 홍차와 민트의 향기가 베이고, 버스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늦여름의 바람까지 더해져 쓸 수 없게 되어버렸어. (그런 걸 어떻게 쓰겠어?) 간직하게 되었어. 두 장의 반듯하게 접힌 티슈가 든 투명한 셀로판지 포켓은 지금도 내 가방 안주머니 속에 들어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