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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정 Apr 20. 2021

sou·ve·nir



짐을 꾸려 내려와 늦은 아침을 먹고 말끔히 치워진 식당 테이블에 다시 앉았어. 하얀 종이와 연필 앞에서 지난밤의 산책을 떠올렸어. 새까만 밤, 눈을 감은 건지 뜬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아 꿈벅꿈벅하던 밤. 벗은 발 발바닥으로 전해지던 오돌토돌한 아스팔트의 감촉과 어서 돌아가고 싶다고 칭얼대는 아이들의 소리와 그걸 어르는 가만가만 목소리와 그 모든 것을 꿀꺽 삼킨 까만색을 떠올렸어.


허공에 매달려 기억을 더듬다가 선생님을 봤어. 선생님은 차호에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붓고 있었어. 우려진 차를 공도배에 천천히 따르고,  개의 각기 다른 모양의 통에 오렌지 주스를 붓고, 시럽을 넣고, 얼음을 넣고, 뜨거운 차를 붓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금세  애플 민트를 띄우는 선생님의 모습을 나는 지켜보았어.


기차역까지는 버스로 1시간 10분. 버스에 오르는 아이들과 내 손에는 떼오 오랑쥬가 든 병이 하나씩 들려있었어. 아니다, 내 손에는 하나가 더 있었다. 투명한 셀로판지 포켓. 반듯하게 접힌 두 장의 티슈가 든 정성 가득한 포켓.  건너편에 자리 하나씩 차지하고 앉은 아이들은 버스가 덜컹거리면서 가는 게 재밌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것처럼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꼭 잡은 채로 작은 탄성을 터뜨렸어. 다른 한 손에 든 떼오 오랑쥬도 잊지 않고 마셔가면서. 그 모습이 신기하고, 기특하고, 허전하고, 홀가분하고. 한 뼘, 한 뼘 아이들과 나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상상해보게도 되었어.


그러는 사이, 투명한 셀로판지 포켓 안에 새까만 밤이 담기고, 오렌지와 홍차와 민트의 향기가 베이고, 버스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늦여름의 바람까지 더해져 쓸 수 없게 되어버렸어. (그런 걸 어떻게 쓰겠어?) 간직하게 되었어. 두 장의 반듯하게 접힌 티슈가 든 투명한 셀로판지 포켓은 지금도 내 가방 안주머니 속에 들어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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