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소정 Jan 10. 2022

주체가 된다.

또 하나의 시작점



시작은 의외의 지점에서였다. 

내 안에 은밀하게 빚어 놓은 생각이 한 권의 책과 만나 

서로의 닮아 있음을 놀라움으로 확인하는 경험을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맞장구를 치며 재밌게 읽었는데 

책장을 덮고 나서는 오래도록 개운치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쓰고 진한 체념의 향이 내 안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다움’으로 규정짓고 나서 멈추어 버린 사유의 감각이 

탁하고 미지근한 고인 물처럼 차올랐다.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페터 비에리는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부재가 붙은 그의 저서 <삶의 격>에서 

'주체가 된다'는 것을 “자신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한 걸음 떨어져서 

새로운 사고와 희망과 감정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숙고하고 

그 방향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음이라고 기술했다.

나는 어느 한 권의 책에서 마주한 내 닮은꼴의 인간상을 

페터 비에리가 제시한 주체적인 인간상과 견주어 보았다.


'반 발짝의 성찰에 자족하며, 

새로움 앞에 문을 닫아 버리고, 

희망하는 대신 스스로를 체념시키며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고 감정을 조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나에게 물었다.


‘그것으로 충분한가?’

다시 물었다. 

여전히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지식의 소비자, 예술의 소비자, 상품의 소비자로

적당히 소비자로 살 작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다. 

나는 다시 읽고, 쓰고, 그리기로 한다.

여전히 의미도 목적도 희미하지만

어쩌면 이런 행위들이 참다운 나다움으로 

나아가게 해 줄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설령 그러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유하고 성찰하는 삶에 대한 상징으로 나는 선택한다. 

그렇게 나는 주체가 되고자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리굴비와 오차즈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